비상계엄·탄핵 정국과 제주항공 여객기 추락 사고의 여파로 지난해 4분기 성장률이 주저앉으면서 지난해 한국 경제가 2% 성장하는 데 그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전쟁의 포문을 연 데다 건설 경기 부진과 수출 둔화가 가속화하고 있어 이대로라면 1%대 저성장이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4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전 분기 대비 0.1%(속보치) 성장했다고 밝혔다. 이는 한은의 당초 전망치(0.5%)의 5분의 1 수준이다. 한은은 △지난해 12월 정치 불확실성 확대 △소비심리 위축 △건설 수주·착공 부진 등이 주요 이유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4분기 민간소비는 0.2% 증가하는 데 그쳤고 건설투자는 3.2% 감소했다. 반면 설비투자는 반도체 제조용 장비 수요에 1.6% 성장했다. 수출 역시 정보기술(IT) 제품을 중심으로 0.3% 늘었다.
4분기 성장이 고꾸라지면서 지난해 전체 성장률도 한은의 예상치(2.2%)보다 낮은 2%를 기록했다. 건설업(-2.6%)과 도소매 및 숙박음식업(-1.4%) 등 내수 업종의 생산 감소가 뚜렷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문제가 이어진 데다 환율이 불안하니 한은에서 금리 인하를 빠르게 하기 어려웠다”며 “수출 둔화세가 나타난 데다 정치 리스크까지 불거지면서 성장률이 기대보다 낮게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앞으로다. 정치 위기가 계속되고 있고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른 수출 감소가 예상된다. 한은은 “정치 불확실성에 따른 경제심리 위축, 건설 경기 부진 심화는 올해 1분기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며 “미국의 신정부 정책, 추가경정예산 논의 등이 주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국내총생산(GDP) 속보치는 내수 전반이 위태롭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수출 역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통상정책과 중국발 저가 제품 밀어내기에 요동칠 공산이 크다. 전문가들은 경기 부양 없이는 올해 GDP가 1%대 저성장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GDP에서 가장 저조한 실적을 보인 부문은 단연 건설투자였다. 지난해 연간 기준으로 2.7%나 감소하며 주요 지표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지난해 4분기 건설투자는 전년 동기와 비교해도 5.3% 감소했다”며 “4분기 GDP에 가장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민간소비 증가율도 전년(1.8%)보다 0.7%포인트 하락한 1.1%로 집계됐다. 이미 재작년에도 민간소비가 부진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었는데 이보다 더 악화한 것이다. 최근의 정치 불안으로 민간소비가 억눌리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한은의 관계자는 “비상계엄 여파와 (제주항공) 항공기 사고가 겹치면서 연말 소비심리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며 “민간소비가 계속 성장률을 밑돌고 있는데 여기에는 경기·심리·구조적 요인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해 전망은 더 어둡다. 당장 기재부는 올해 GDP 성장률 예상치를 1.8%로 제시하며 2%대 성장이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한은은 20일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지난해 11월 발표한 1.9%에서 1.6~1.7%로 내려 잡았다. 자본시장연구원(1.6%), JP모건(1.3%)처럼 1%대 초중반 성장률을 내다보는 기관들도 적지 않다.
이는 GDP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수출이 삐걱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수출은 1년 전보다 6.9%나 늘었다. 수출 경기와 연동되는 경향이 강한 설비투자 역시 1.8% 늘어 전년(1.1%)보다 증가 폭이 확대됐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공약대로 공격적인 관세 정책을 추진할 경우 수출이 급격히 둔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정부는 올해 수출 증가율이 1.5%에 그칠 것이라고 일찌감치 전망하기도 했다.
당장 이달 수출부터 마이너스를 기록할 가능성에 힘이 실린다.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20일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5.1% 감소했다. 박성택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1월에는 정보기술(IT) 제품의 글로벌 수요 둔화, 반도체 가격 하락과 함께 6일간의 설 연휴로 조업 일수까지 크게 감소하면서 수출이 일시적으로 둔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수도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한은은 이날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0.5%보다 낮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치 불확실성으로 1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점치는 시각도 적지 않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치 혼란이 장기화하고 있어 1분기만 놓고 보면 역성장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고용 부진도 걸림돌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취업자 수는 5만 2000명 줄어 3년 10개월 만에 감소세로 전환했다. 건설·제조·도소매업 같은 경기 민감 업종의 노동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고용 불황→소비 감소→내수·노동시장 약화’의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정부는 올해 취업자 증가폭을 지난해 실적(15만 9000명)보다 적은 12만 명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예산 조기 집행을 통해 상반기 경기를 뒷받침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추가경정예산이 없으면 이 같은 대책도 한계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2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경기 둔화의 골이 깊어지지 않도록 여야 및 정부의 정치적 합의를 통해 적시에 실효성 있는 추경과 같은 경기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해석했다.
산업 경쟁력 강화를 병행하지 않으면 재정 집행도 단기 처방에 그칠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정·통화 확대는 필요하지만 둘 다 각자의 이유로 그 여력이 제한적”이라며 “현재의 경제성장률 부진의 근본 원인은 산업 경쟁력 약화에 있는 만큼 규제 완화나 산업 구조조정과 같은 조치가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해 11월 22~29일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상경계열 교수 111명을 설문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7.6%가 올해 한국의 잠재성장률을 2% 미만으로 봤다. 중간값은 1.8%였다. 한국의 경쟁력이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에 들어섰다는 의미의 ‘피크 코리아’ 시각에도 응답자 66.7%가 동의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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