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흔이 되도록 하루도 안 쉬고 일을 했는데 그 정도도 안 되면 되겠나.”
건장하고 다부진 얼굴을 한 노작가는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살아생전 더 좋은 작품, 더 많은 작품을 만들고 보여주는 게 나의 의무일 뿐 ‘세계적인 작가’라는 명성은 나하고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내 작품이 이제 이렇게 인정받을 수 있구나, 더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024년 혜성처럼 등장한 구순의 조각가
작가는 지난해 국내 미술 작가 중 세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1세대 추상 조각가 김윤신(90)이다. 그는 지난해 미국 온라인 미술 플랫폼 아트시(Artsy)가 선정한 ‘2024년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10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명단에는 우리에게 ‘벽에 붙인 바나나’로 잘 알려져 있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미국 작가 제프리 깁슨 등이 포함돼 있다. 아트시는 당시 김윤신을 두고 “60여년 동안 회화와 나무 조각 작업을 하며 주목받지 못했지만 올해 세계 미술계에 극적으로 등장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아트시의 표현대로 김윤신은 2023년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연 전시 ‘김윤신:더하고 나누며, 하나’와 함께 갑자기 국내 미술계에 등장했다. 해당 전시가 호평을 받으면서 2024년 국제갤러리, 리먼 머핀과 공동 소속 계약을 체결했고 4월에 개막한 제 60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청작가로 참여했다. 한마디로 지난해 한국 미술은 ‘김윤신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작가는 그러한 세상의 관심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현재 진행 중인 작업에 쏠려 있었다. 이달 13일 경기도 파주의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인터뷰 내내 ‘더 많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을 외우듯 반복해서 말했다.
40년 아르헨티나 생활 접고 한국으로
김윤신은 1935년 지금의 북한 원산에서 태어나 목재·석재·석판화·회화를 아우르며 예술 세계를 구축한 1세대 여성 조각가다. 그는 1964년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조각과 석판화를 수학했고 유학 후 10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국내에서 여성 조각가들의 활동을 위해 다양한 조직을 만들며 활동하던 작가는 1983년 돌연 아르헨티나로 떠난다. 고유한 질감과 생명력을 지닌 남미의 자생종에 반해 아예 작업의 터전을 옮긴 것이다.
그렇게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작가는 무려 40년을 그곳에서 조각에 몰두했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꽤 유명하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김윤신 미술관’이 세워져 있고 2018년 주아르헨티나 한국문화원에는 그의 상설 전시관이 설립됐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돌연 고국에 돌아왔다. 국제갤러리 등과 손잡고 그간 혼자서 해온 작업을 대중에게 좀 더 널리 알리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고국에 정착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작가의 자식과도 같은 조각 작품들을 아르헨티나가 쉽게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조각을 작가의 이삿짐 목록에 포함시켜주지 않았고 결국 작품은 수출 과정을 통해 옮겨졌다. 작가는 꼬박 100일에 걸쳐 미술관 관계자들과 함께 커다란 사과 박스를 만들어 일일이 작품을 넣고 포장했다.
그는 “정부 관계자가 와서 ‘지역에 소문이 나면 범죄에 연루될 수 있으니 남들 모르게 포장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몇몇 작품은 압도적인 크기 때문에 미술관 벽을 뜯어내고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작품이 미술관 벽을 뚫고 나온 셈이다. 그렇게 힘들게 가져온 작품 1000여 점 중 일부는 지난해 각종 아트페어에서 새 주인을 찾아 떠났다. 작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뿐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 멕시코 국립현대미술관 등 각국의 주요 미술 기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만큼 작품이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조각 대신 회화·남미의 선 대신 한국의 선
그렇다면 한국에서 김윤신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을까. 김윤신의 모든 작품은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 分一)’이라는 철학을 관통한다. 작가는 “내가 만드는 조각 작품이 나의 상대다. 이 작품을 보고 내가 작업을 해서 작품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며 “그 작품이 밖으로 나가 생명의 원천을 이야기하면 다시 나와 분리되지만, 결국 나와 하나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작가가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서 소개한 4점의 나무 조각과 4점의 돌 조각은 작가 자신과 재료, 관객 및 세상과의 진정한 합치를 소망하고 실천한 대표작들로 세계 각국에서 온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하지만 최근 작가는 조각보다 회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실제로 작업실 벽에는 최근 작가가 집중하고 있는 회화 작품이 여러 점 걸려 있었다. 작가는 수년 전부터 남미 대지의 생명력을 담은 회화 작업에 매진해왔다. 특히 그의 회화는 나무 조각을 금속으로 주조한 후 이를 캔버스 삼아 회화를 펼쳐놓는 방식으로, ‘회화이면서 조각’인 ‘회화 조각’이다. 그렇게 그는 회화 속에 생명의 본질을 다채로운 색으로 담아낸다. 작가는 자신의 회화에 ‘노래하는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같은 회화라도 한국에서 제작한 회화 작품은 그간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제작해 선보인 회화와 다소 다르다. 캔버스 위에 놓인 점의 크기도 작고 선도 얇다. 작가는 “같은 회화여도 한국에서 제작한 작품은 아르헨티나에서 제작한 작품과 선의 굵기, 붓의 획 등 모든 면에서 명백하게 다르다”고 작품을 설명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와 한국은 모든 게 다 반대고 수십 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과거 내가 살 때와도 달라졌다”며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의 변화가 작품에 반영됐다”고 말했다. 지금 그는 주변에 보이는 사물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찍는 방식으로 회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한국에서 제작한 회화는 먼 훗날 김윤신의 ‘한국 시기’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더 많은 작품 남기고 싶어…마음 급하다”
하지만 김윤신은 역시 조각이 어울린다. 현재 한국에 마련한 작업실에서는 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전기톱을 사용하기 쉽지 않다. 오랜 시간 남미에서 지낸 작가에게 한국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워 야외에서 작업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란한 전기톱 소음을 눈 감아줄 만한 실내 공간을 찾기도 쉽지 않다. 작가는 수장고에서 쉬고 있는 전기톱을 들고 “이걸 빨리 만져야 하는데…”라고 말하며 아쉬움을 표출했다.
그의 수장고에는 목재·석재 등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가져온 수많은 작품이 마치 박물관의 유물처럼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이 모든 나무와 돌을 만지고 다듬었기 때문일까. 그의 몸에서는 건장한 젊은 남성처럼 에너지가 샘솟았다. 작가는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좁은 작업실에서 회화로 쏟아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어디에서 상을 받고, 작품이 팔리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며 “그저 후세에 기억될 더 많은 작품을 하루라도 빨리 만들고 싶어 마음이 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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