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인공지능(AI) 모델 ‘딥시크 R1’ 발표에 따른 파장 속에서 국내 스타트업 업계가 기회의 틈을 엿보고 있다.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는 각종 제약 조건 속에서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의 최첨단 AI 모델에 필적하는 제품을 만들어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고성능 AI 모델을 개발하려면 장기간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기술 업계의 기존 정설이 깨졌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주로 AI 모델을 응용해 상업 서비스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는 국내 스타트업은 기술 패러다임 전환을 활용해 글로벌 AI 경쟁에 합류할 계획이다.
“韓 기업에 기회 요인”
1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스타트업 업계는 딥시크의 출현을 기회로 인식하고 경쟁력 강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AI 슬립테크(수면 기술) 기업 에이슬립의 창업자 이동헌 대표는 “대부분 국내 스타트업에게는 위협보다 기회가 더 크다는 판단”이라며 “기존 미국 빅테크 AI 모델 사용료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에 저비용·고효율 대규모언어모델(LLM)의 출현은 우리에게 기회 요인”이라고 말했다. AI 에듀테크(교육 기술) 기업 매스프레소를 창업한 이용재 대표 또한 “(딥시크 출현은) AI 서비스를 중심 사업으로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AI 산업 생태계는 빠르게 다변화하고 있다. △AI 반도체 설계 기업(엔비디아) △AI 반도체 생산 기업(TSMC)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아마존) △AI 모델 개발 기업(오픈AI·앤스로픽) △AI 서비스 기업(세일즈포스·SAP) 등이 어우러지며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처럼 클라우드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AI 모델 개발사의 주주이고, 소비자용(B2C) AI 서비스를 만드는 기업도 있다. 중요한 것은 국내 스타트업 대다수는 이 생태계 속 마지막 단계, 즉 AI 모델을 활용한 상업 서비스를 만드는 분야에 집중 포진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로톡’ 운영·개발사인 로앤컴퍼니다. 로앤컴퍼니는 지난해 7월 법률 AI 비서 서비스 ‘슈퍼로이어’를 출시했다. 슈퍼로이어는 소장에 대한 답변서 초안을 써주거나 법령·판례를 검색하는 일을 도와준다. 출시 6개월 만에 전국 개업 변호사 20%를 회원으로 확보했다. 로앤컴퍼니는 복수의 외부 AI 모델에 기초해 이 서비스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스프레소가 만든 수학 풀이 AI 서비스 ‘콴다’는 빅테크 메타의 AI 모델 ‘라마’를 활용했다. 두 기업 모두 기초 모델을 단순 미세 조정하는(파인 튜닝·fine tuning) 수준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서비스 근간은 외부에 있다.
딥시크 출현은 일부 초거대기업을 향한 국내 스타트업의 의존도를 낮추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이번 사건으로 얻은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미국의 초거대 정보기술(IT) 그룹에 의해 LLM이 완전 독점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라며 “(독점의 해제는) AI 활용도 향상으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사업 기회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건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DSC인베스트먼트 대표)은 “딥시크로 LLM 간 경쟁이 촉진돼 사용 비용이 낮아지면 국내 AI 서비스 개발 스타트업은 수혜를 입는다”고 분석했다.
‘스푸트니크 모멘트’
실리콘밸리 주요 벤처캐피털(VC) 앤드리슨호로위츠(a16z)을 공동 창업한 마크 앤드리슨은 딥시크 출현을 두고 “AI의 스푸트니크 모멘트”라는 평가를 내렸다. 서방과 공산권 사이 체제 경쟁이 한창이던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린 것에 딥시크 등장을 비유한 것이다. 2022년 챗GPT 출시로 시작된 ‘AI 붐’의 최대 수혜주로 꼽히는 엔비디아의 주가는 1월 27일 17% 폭락했다. 이날에만 시가총액 6000억 달러(약 872조 원) 가량이 증발하면서 미국 증시 역사상 가장 커다란 하루 손실폭을 기록했다.
딥시크는 자사의 AI 모델 딥시크 R1을 저비용·고효율로 개발했다고 밝히고 있다. 딥시크가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딥시크 R1의 근간이 되는 훈련 모델 ‘딥시크 V3’ 개발에 투입된 비용은 557만 6000달러(약 81억 원)다. 미국 유력 AI 스타트업 앤스로픽을 이끄는 다리오 아모데이 최고경영자(CEO)는 한 개의 AI 모델을 개발하는 데 1억~10억 달러(약 1454억~1조 4535억 원)가 든다고 지난해 밝혔다. 그런데도 딥시크 R1은 각종 성능 테스트에서 지난해 12월 출시된 오픈AI ‘o1’에 근접하는 성과를 냈다.
일각에서는 딥시크 개발 과정·성능에 대한 신중론이 일고 있지만 세계 AI·IT 업계 양상이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보다 힘을 얻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 관계자는 딥시크를 두고 “교훈은 우리도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는 AI 모델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미스트랄이 있다. 김창규 우리벤처파트너스 대표는 서울경제신문에 “엔비디아 등이 독점했던 AI 시장에 파괴적 혁신이 생길 수 있는 틈이 생기는 것 같다”는 의견을 전했다.
전화성 초기투자액셀러레이터협회장(씨엔티테크 대표)은 “딥시크가 만든 저비용·고효율 AI 학습 기법을 국내 스타트업도 충분히 벤치마킹할 만하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생성 AI 원천기술 개발에 대한 도전의 흐름이 생길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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