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3E의 ‘개선 제품’을 내놓는다. 지난해 HBM 공급과 최선단 D램 개발에서 SK하이닉스에 뒤처지며 고전한 삼성전자가 올해 반등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삼성전자는 31일 2024년도 확정 실적을 발표하면서 매출 309조 9000억 원, 영업이익 32조 7000억 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매출과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각각 16.2%, 395.5% 올랐다. 반도체(DS) 부문의 매출은 111조 1000억 원, 영업이익은 15조 1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DS 부문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HBM을 앞세워 영업이익 23조 원을 넘긴 SK하이닉스보다 약 8조 원이나 적다.
DS 부문은 지난해 선단 메모리에서 부진했다. 인공지능(AI) 칩 분야 최대 고객사인 엔비디아에 HBM을 적기에 공급하지 못했고 10㎚(나노미터·10억분의 1m) 6세대 D램 개발 속도 역시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날 개최된 2024년도 4분기 실적 발표회에서는 HBM3E 개선 제품을 내놓겠다고 처음으로 밝혔다. 김재준 삼성전자 부사장은 “일부 고객사에 HBM3E 개선 제품을 1분기 말부터 공급할 예정”이라며 “가시적인 공급 증가는 2분기부터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개선 제품은 HBM3E 8단과 12단 모두 해당될 것으로 추정된다. HBM 구조를 다시 설계하거나 공정에서의 장비·재료 조성을 변경해 수율과 성능 개선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모바일·PC 수요 부진이 장기화하면서 레거시(구형) 메모리 생산량도 낮출 계획이다. 김 부사장은 “D램·낸드 모두 레거시 제품을 줄이면서 선단 공정 전환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영 어렵지만 단시간 내 해결"…삼성전자, HBM 생산 올해 2배 늘린다
이번 실적 발표회에서는 박순철 삼성전자 신임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등장했다. 삼성전자 실적 발표에 CFO가 직접 나서서 경영 현황에 대해 설명한 것은 2021년 1월 최윤호 CFO가 3개년 주주 환원 정책을 설명하면서 인수합병(M&A) 준비를 공식화한 이후 지금까지 없었다. CFO의 등장은 4년 만으로 삼성전자에 엄습한 위기 국면을 타개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행보로도 읽힌다. 실제 박 CFO는 “현재 경영 상황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고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와 주요 사업 경쟁력 바탕으로 현재 이슈는 점차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고대역폭메모리(HBM) 5세대인 HBM3E 개선 제품의 구체적인 공급 계획을 발표하면서 의지를 드러냈다. 설계 원점부터 재검토를 거친 결과물로 메모리 기술 경쟁력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지난해 4분기 반도체 사업이 영업이익 3조 원을 밑도는 부진한 성적표를 거뒀지만 올해는 차세대 HBM 제품과 커스텀(맞춤형) 메모리 등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경쟁 심화가 예상되는 레거시 D램 매출 비중은 올해 한 자릿수 수준까지 줄이는 한편 HBM 생산량은 전년 대비 2배 늘리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분기 실적 발표에서 주요 고객사의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 과제에 맞춰 HBM3E 개선 제품도 준비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올해 해당 제품에 대한 구체적인 공급 시기를 밝힌 것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삼성의 HBM을 두고 “새로 설계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한 답변 격이다.
엔비디아의 품질 통과를 최종 통과하면 HBM 사업에서 급격한 판매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 초도 공급에서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 등 기존 공급사를 모두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HBM4부터는 경쟁 판도에서 다른 위치를 점하며 역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전체 HBM 비트 공급량이 전년 대비 2배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6세대(1c) D램 기반 HBM4는 올해 하반기부터 양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지난해 53조 6000억 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치의 시설 투자를 집행했고 이 가운데 반도체에만 46조 3000억 원을 투입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부터 HBM3E 8단·12단 제품을 양산하고 있다. 그러나 ‘큰손’ 고객사인 엔비디아로의 공급이 미뤄지면서 지난해 4분기 HBM 판매는 기대치를 밑돌았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지난해 4분기에는 지정학적 이슈와 올해 1분기를 목표로 준비 중인 HBM3E 개선 제품 계획에 따른 영향이 맞물려 HBM 수요에 일부 변동이 발생했다”며 “4분기 HBM 매출은 당초 전망을 소폭 하회해 전 분기 대비 1.9배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본격적인 수요 개선은 2분기부터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1분기에는 미국 정부의 첨단 반도체와 관련한 수출통제 조치로 일시적인 수요 공백을 예상했다. 모바일과 PC 고객사의 재고 조정에 GPU 공급 제약으로 인한 빅테크들의 메모리 주문 감소가 겹치는 등 업황도 마냥 밝지는 않다. 삼성전자는 “최근 미국 정부에서 발표한 첨단 반도체 수출통제의 영향뿐 아니라 개선 제품 계획 발표 이후 주요 고객사들의 기존 수요가 개선 제품 쪽으로 옮겨가며 HBM의 일시적인 수요 공백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메모리 양극화에 대비해 구형 제품 비중을 줄이고 첨단 공정으로의 전환 속도도 높인다. 중국 대표 D램 업체인 CXMT는 범용인 DDR4 D램을 시작으로 DDR5 시장까지 진출하며 삼성전자의 레거시 D램 점유율을 갉아먹고 있다. 삼성전자는 “경쟁이 심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DDR4·LPDDR4의 경우 2024년 30% 초반 수준이었던 매출 비중을 올해 한 자릿수 수준까지 가파르게 축소해나갈 계획”이라며 “DDR4와 LPDDR4 공급 과잉 이슈가 당사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강조했다.
시스템LSI(설계)와 파운드리를 포함하는 비메모리 부문에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회사 측은 두 사업부의 영업이익을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2조 원이 넘는 적자를 냈다고 추정하고 있다. 파운드리 사업에서는 2㎚(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에 승부수를 걸며 올해 2나노 1세대 공정, 내년 2세대 공정 양산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설계 사업에서는 갤럭시 S25에 엑시노스 2500 탑재가 불발된 영향으로 실적 부진이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하반기 출시될 플래그십 모델 진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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