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의 생산 라인을 불법으로 멈춰 세운 시위에 대해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하면서 기업 현장은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특히 법원이 최근 노사관계와 관련된 소송에서 잇따라 노조 측 손을 들어주면서 기업들이 노조의 위세에 위축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부산고등법원 민사6부(재판장 박운삼)는 현대자동차가 금속노조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및 지회 노조원들에 대해 불법 쟁의행위로 비롯된 손해를 배상하라며 낸 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현대차 측 청구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는 지난 2012년 8월 사내하청 비정규직 근로자의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울산공장 의장 라인 등을 불법으로 멈춰 세웠다. 생산 라인이 중단되면서 이 기간 기업들은 매출 감소는 물론 관련 자산의 고정비용 등을 떠안아야 했다. 그런데 법원이 회사 측 손해에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앞서 법원은 1심과 2심에서 현대차 측 일부 승소를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23년 6월 손해배상액을 재산정하라며 원심판결을 파기 환송했고 결국 법원은 현대차 측의 청구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계는 노조 측 손을 들어준 이번 부산고법의 판결을 두고 “불법 쟁의행위로 입은 기업의 피해 회복을 명시한 기존 법리와 배치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민사소송법 기본 원칙인 '입증 책임의 원칙'을 외면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노조 측 책임을 인정한 1심 및 2심 판단과 달리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파업 후 추가 생산을 통해 부족 생산량이 만회됐다’는 노조 측의 일방적 주장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입증 책임의 원칙에 따라 생산 부족분 만회 여부는 노조 측 증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조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불법 쟁의행위에 따른 부족 생산량을 만회하기 위한 추가 생산 역시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법원이 증거 및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채증 법칙' 역시 소홀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재판부는 불법 쟁의행위 당시인 2012년 8월 계획 생산량보다 1만 2700대 적게 생산됐지만 연간 계획 생산량 기준 3300대가 더 생산됐다며 파업 이후 추가 생산이 이뤄진 것으로 결론지었다.
현대차 측은 매년 초 세우는 '계획 생산량'은 미확정 단순 목표치로 시장 상황에 따라 매월 탄력으로 운영했고 2012년 연간 목표 대비 1만 6150대 적게 생산했다고 입증했다. 피고 측 증인도 실제 운영계획은 계획생산량 대비 수정된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불법 쟁의행위로 인한 부족 생산량을 모두 만회했다고 최종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현대차 생산방식을 '주문생산방식'으로 판단하며 일시적 생산 지연이 매매계약 취소 가능성이 높지 않아 매출 감소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봤다. 이는 자동차 업계가 일정 물량 이상의 재고를 확보해 두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현대차는 고객 주문 물량 외에도 다양한 옵션의 차종을 미리 생산하는데 불법 쟁의행위에 따른 조업 중단으로 생산 및 판매 차질이 불가피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파기환송심 판결은 법리를 오해하고 채증법칙을 위반해 가며 생산시설 점거와 같은 불법 쟁의행위에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며 "향후 다양한 불법 변칙 쟁의행위를 조장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법원은 최근 11년 간 유지되던 기존 판례까지 뒤집으며 노조의 손을 들어줘 업계에서 문제가 되기도 헀다. 지난해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통상임금을 정하는 기준에서 고정성을 폐기했다. 소정 근로 제공에 대한 대가로 지급받는 정기성과 일률성이 있는 임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통상임금 범위를 확대했다. 이는 2013년 판례를 11년 만에 뒤집은 것이다.
이 판결로 인해 현장에는 후폭풍이 들이닥치고 있다. 일부 대기업 노조는 과거 소급분까지 받아내겠다는 입장을 천명했고 노조 지도부가 주도하는 소송전에 수만 명이 참여하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해외에서는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경쟁 심화 등으로 힘겨워하고 있고, 국내에서는 저성장 속 고금리·고물가·고환율 등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사법부의 노사관계 관련 최근 판결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에 놓인 기업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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