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달 5일 “배터리·바이오 등 첨단산업과 기술을 지원하는 ‘첨단전략산업기금’을 산업은행에 신설하겠다”며 “저리 대출과 지분 투자 등 다양한 지원 방식을 추진할 계획이며 구체적인 기금 신설 방안을 조속히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분 투자 같은 직접 지원도 병행해 전략산업 보조금 부재의 공백을 메우겠다는 뜻이다. 당시 거론된 기금 규모가 최소 34조 원이다.
금융위원회가 구상 중인 지원 규모는 최소 100조 원이다. 산업은행에 설치하는 50조 원 규모의 기금에 시중은행들이 50조 원을 추가로 태우는 형태다. 정부는 펀드를 조성한 뒤 산은이 첨단전략산업기금을 먼저 출자해 마중물 역할을 하면 시중은행이 뒤따라 돈을 투입하는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
정부가 지원액을 대폭 늘린 것은 △인공지능(AI) 분야의 딥시크 충격 △미국의 관세 전쟁 확대 △중국의 기술 추격 등이 주요 원인이다. 글로벌 경제와 무역 체계가 뒤바뀌는 상황에서 국책은행 자금만으로는 위기 대응이 쉽지 않다고 보고 지원 규모를 늘려 트럼프발 파고를 막을 방파제를 쌓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정부가 검토 중인 첨단전략산업기금 지원 방안에서 눈에 띄는 대목도 금액과 함께 지원 대상을 넓힌 점이다. 정부는 당초 예고한 반도체와 2차전지·바이오 같은 첨단산업뿐 아니라 경쟁 격화 주력산업을 지원 목록에 올렸다. 철강과 자동차 등 미국 관세에 직접 노출된 기간산업으로 범위를 넓힌 것이다. 정부는 지원 대상을 기간산업 중 ‘기업활력법(원샷법)’ 관련 요건을 맞춘 기업으로 구체화하는 방안을 살펴보고 있다.
정부가 지원 대상 업종을 대폭 확대한 것은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기간산업안정기금을 마련한 후 처음이다. 미국의 고율 관세로 우리 기업이 입을 피해가 코로나 사태 때 이상으로 클 수 있다는 위기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정부는 특히 기간산업안정기금의 경우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고용을 일정 규모로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지만 첨단전략산업기금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을 계획이다. 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은 “관세가 오르면 우리 기업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그렇지 않아도 경쟁국들은 보조금을 통해 자국 산업을 지원하고 있는 판이라 우리나라도 경쟁국 수준의 지원은 이뤄져야 한다”고 전했다.
정부가 기업당 지원 한도를 두지 않으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개별 기업의 상환 능력을 일일이 따지기보다는 우리 경제와 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을 우선적으로 살피겠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 정부는 별도의 기금운용위원회를 만들어 지원 규모를 심의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소비가 부진한 가운데 글로벌 보호무역 기조에 수출이 부진해질 수 있다는 점 또한 정부가 기간산업 지원에 나서게 된 배경 중 하나다. 지난해 계엄 이후 소비심리가 크게 위축됐는데 수출마저 무너지면 경기 침체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역성장한 수출은 이달 1~10일 기준 일평균 수출액이 6.4% 감소했다. 2023년 9월(-14.5%)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트럼프 정부가 예고한 고율의 관세가 실제 부과되면 수출은 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KB증권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산 자동차에 10%의 관세를 부과할 경우 현대자동차와 기아의 영업이익은 무려 4조 3000억 원가량 감소한다. 지난해 한국의 자동차 수출액은 707억 8900만 달러다. 이 중 대미 수출액은 347억 4400만 달러로 비중이 49.1%에 달한다. 박양균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정책본부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전에 없이 커지는 와중에 트럼프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우리 기업은 전례 없는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다”면서 “기업의 수출마저 꺾이면 한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는 만큼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할 때”라고 조언했다.
정부는 또 전체 지원금을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에 각각 절반씩 배정하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기업의 단순 운영자금이나 기존 차입금을 상환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지원하지 않는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미국의 관세정책에 따른 국내 산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구체적인 내용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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