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올해 하반기부터 상장사와 전문투자자 3500여 곳을 대상으로 비트코인 같은 가상자산 매매를 허용한다. 대학과 공익법인(지정기부금 단체), 가상자산거래소는 이보다 앞선 4월부터 매도에 한해 거래가 가능해진다. 다만 금융 당국이 가상자산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나 일반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 계좌 전면 허용은 여전히 꺼리고 있어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13일 제3차 가상자산위원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법인의 가상자산 시장 참여 로드맵’을 확정했다.
정부는 이번 로드맵에 영리법인의 가상자산 실명 계좌 발급 방안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먼저 올해 하반기부터 자본시장법상 전문투자자 중 금융사를 제외한 상장사와 금융투자 상품 잔액이 100억 원 이상인 전문투자자 등록 법인 3500여 곳을 대상으로 투자·재무 목적의 매매 실명 거래를 시범 운영할 계획이다.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는 2017년부터 원칙적으로 제한돼왔다.
당국은 전문투자자의 경우 파생상품을 매매할 수 있기 때문에 가상자산 거래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일반 법인이 가상자산 거래에 나설 경우 자금세탁의 우려가 커지는 만큼 시범 운영 전에 공시·입출고·수탁 관련 규제를 보완할 계획이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일단 위험 감수 능력이 있는 전문투자자를 대상으로 먼저 가상자산 거래를 시범 운영하려는 취지”라며 “이를 토대로 제도 보완 방안을 파악한 뒤 일반 기업 전체에 대한 가상자산 법인 거래 허용 여부를 검토할 때 참고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대학과 공익법인은 올 2분기부터 매도 거래에 한해 법인 실명 계좌 발급을 허용할 계획이다. 이들 비영리법인이 기부받은 가상자산을 현금화할 수 있도록 빗장을 풀려는 취지다. 예를 들어 서울대는 2022년 위메이드로부터 10억 원 상당의 가상자산을 기부받았는데 그동안 법인 계좌 신설이 법적으로 막혀 있어 현금화하지 못해왔다. 가상자산거래소도 수수료로 받은 가상자산을 시장에 팔아 경상비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번에 금융 당국이 법인 계좌를 단계적으로 허용하기로 한 것은 가상자산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가상자산 투기 수요를 염두에 두고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를 금지해왔다. 그러나 국내 기업 중에도 블록체인 사업 진출과 자산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원하는 곳이 많은 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를 필두로 각국에서 가상자산을 제도권에 포섭하고 있어 ‘규제 일변도’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기류가 정부 내에서도 강했다. 미국만 해도 최대 가상자산거래소인 코인베이스의 기관투자가 비중이 2022년 기준 약 80%에 달한다.
금융 업계에서도 법인 계좌 허용 기조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법인이 참가자로 들어오는 만큼 개인 단타 투자자 위주의 시장 흐름이 바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해외 현지법인의 가상자산 보유 규모는 약 6조 5000억 원으로 법인 거래가 확대되면 국내로 자금이 들어올 수 있다. 한 가상자산 시장 관계자는 “법인은 개인에 비해 중장기 투자 수요가 많다”며 “기존에는 가상자산 시장이 개인투자자 위주로 운영돼왔는데 이번에 법인이 참여할 길이 열리면서 정부가 우려한 시장 변동성이나 김치 프리미엄이 완화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다만 법인 거래 전면 허용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을 보완해 불건전 영업행위 규제나 가상자산거래소 공시 제도를 추가로 마련한 뒤 중장기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올해 예정돼 있던 가상자산 과세가 2027년으로 2년 유예된 것도 변수다.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현재 전반적인 가상자산 규율 체계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이며 외환·세제도 다듬을 필요가 있다”며 “일반 법인에 가상자산 거래를 허용하는 것은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이유에서 가상자산 현물 ETF 허용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 부위원장은 “가상자산 시장 리스크가 금융시장으로 전이될 우려가 있다”며 “가상자산 현물 ETF에 대해서는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은 현재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법인 가상자산 거래 계좌 허용을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은 의미가 있지만 실효성이 적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상자산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진정으로 시장을 활성화할 생각이 있었다면 현물 ETF부터 승인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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