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지·페인트·건축자재 등 전통적인 산업용 소재 기업들이 반도체 장비, 2차전지 등 신기술 시장 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디지털 전환(DX)과 경기침체 등의 요인으로 본업인 제지, 페인트 부문 수익성이 악화하는 가운데 새로운 캐시카우를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다년 간의 연구개발(R&D)을 통해 쌓은 기술력을 기반으로 신제품을 내놓는가 하면 추가 거래처 발굴을 위한 해외 영업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삼화페인트(000390)공업은 다음 달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국내 최대 배터리 전시회인 ‘인터배터리 2025’에 부스를 설치한다. 삼화페인트 관계자는 “올해 열리는 인터배터리에 참가하는 것은 맞다”면서도 “다만 (전시할 제품이) 상용화를 위한 초기 단계라 전시회 전에 미리 공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회사는 현재 2차전지 소재 최종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행사에 지난 해에 참가했던 노루페인트(090350)는 ‘인터배터리 2026’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 있다. 2차전지 소재 특성상 다소 긴 제품화 사이클을 감안해 격년으로 행사에 참여하겠다는 게 회사의 판단이다. 노루페인트는 지난해 13종의 2차전지 소재와 3종의 수소에너지 소재 전시회에서 공개했다. 노루페인트는 이미 국내 한 대기업에 생산 제품을 공급 중이다.
노루페인트와 삼화페인트가 2차전지 소재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면 KCC(002380)는 반도체용 소재 사업 쪽에 힘을 주고 있다. 고전압 전자부품용 세라믹 소재, 파워모듈 반도체용 기판, 반도체 칩을 보호하는 에폭시 봉지재(EMC), 유리장섬유 등이 대표 제품군이다. 이들 제품은 차량용 반도체, 전기·전자 부품에 두루 적용된다.
반도체 관련 시장 등에서 새 먹거리를 찾고 있는 것은 비단 페인트 업계 뿐만 아니다. 한솔제지(213500)를 주력 계열사로 둔 한솔그룹도 한솔아이원스(114810)를 통해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반도체용 장비 세정을 주력 사업으로 삼성전자와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등을 고객사로 둔 이 회사는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밀집해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새네제이에 법인을 설립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극자외선 노광장비 재사용 사업과 심자외선 장비 부품 사업도 본격화하고 있다.
무림페이퍼(009200)가 핵심 계열사인 무림그룹의 경우 국내 유일 자체 생산 펄프를 기반으로 새 사업 기회를 모색 중이다. 펄프몰드, 나노셀룰로오스 등 다양한 신소재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신사업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현재 주력 사업 만으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제지업계의 한 관계자는 “디지털 전환 가속화로 제지업종이 사양산업으로 분류되는 게 현실”이라며 “매 분기 꾸준하게 수백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던 업체가 최근에는 적자 성적표를 받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페인트 업계의 경우 건설 경기 침체 여파로 매출이 게걸음을 하는 실정이다.
본업을 통해 쌓은 기술력이 신사업 진입장벽을 낮췄다는 분석도 나온다. 예를 들어 페인트 원료로 에폭시 수지를 쓰는 페인트 업계의 경우 반도체 패키징용 에폭시 밀봉재 개발이 상대적으로 쉽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제지업체는 특수지, 페인트업체는 특수페인트 생산 등으로 본업을 진화시키는 동시에 급팽창 중인 반도체 장비, 2차전지 시장에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며 “제지·페인트 사업을 뛰어넘어 지속가능한 성장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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