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이 세계 최대 이동통신 전시회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25’에서 한국 최대 규모의 인공지능(AI) 인프라 구축이라는 파격적 계획을 발표한 배경에는 강대국들의 사활을 건 기술 우위 경쟁이 있다. 올해 들어 미국이 720조 원, 유럽연합(EU)이 300조 원, 프랑스와 영국이 각각 160조 원과 25조 원의 대규모 AI 인프라 투자를 공언한 만큼 한국도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다. 특히 이번 MWC는 이 같은 경쟁 개시 직후 처음으로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이 한데 모인 글로벌 AI 행사로 주목받으면서 국내 주요기업 수장들은 새로운 동맹 기회를 찾느라 동분서주했다.
3일(현지 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 피라그란비아 전시장에서 MWC가 개막한 직후 유 대표는 아랍에미리트(UAE) 통신사 이앤(e&) 전시관(부스)을 먼저 찾아 ‘글로벌 텔코 AI 얼라이언스(GTAA)’ 총회를 가졌다. GTAA는 두 회사와 도이체텔레콤·소프트뱅크·싱텔 등 5개 통신사의 AI 동맹으로 이날 약 50분 간 회동을 통해 회원사 확대와 합작법인 설립 등을 위한 협력 강화에 뜻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유 대표는 곧장 삼성전자 부스로 걸음을 옮겨 마침 기다리던 노태문 삼성전자 모바일경험(MX)사업부장(사장)을 만나 20여 분간 회동했다. 삼성전자와 SK텔레콤 부스는 샤오미 등 중국 업체들이 결집한 메인홀 3관에서도 심장부에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데 안 그래도 붐비는 메인스트리트가 두 사람 주변으로 모여든 취재진과 관람객으로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유 대표는 특히 확장현실(XR) 기기 시제품 ‘프로젝트 무한’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쓰고 걸어다닐 수 있는 안경 형태로 제품을 진화시킬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노 사장은 “그럴 생각”이라고 답했다. SK텔레콤은 메타의 XR기기 ‘퀘스트’는 물론 휴메인의 ‘AI핀’ 등 자사 AI를 탑재할 새로운 폼팩터(기기 형태)를 찾는 데 관심을 기울여온 만큼 향후 삼성전자와도 관련 협력을 타진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또 갤럭시 스마트폰의 AI 에이전트(비서) 기능인 ‘나우 브리프’를 두고 서드파티(제3자) 제휴 여부를 언급했다. 유 대표의 관련 질문에 노 사장은 “현재는 삼성전자 자체 앱과 구글 서비스가 먼저 구현됐지만 순차적으로 서드파티 앱들로 확장될 것”이라고 했다. 유 대표 역시 MWC 개막 전 기자간담회를 통해 자사 에이전트 ‘에이닷’을 타사 앱에 적극 탑재해 월간활성이용자수(MAU) 1200만 명을 달성하는 ‘다이버전스’ 전략을 제시한 만큼 향후 나우 브리프에 에이닷이 지원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SK텔레콤은 부스 외형에서도 AI 전략을 여실히 드러냈다. 검은색의 서버 랙 같은 디자인을 갖추고 기계음이 흘러나오며 데이터센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풍겼다. 300㎡ 공간은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제어, 액체 냉각, 그래픽처리장치(GPU) 자원 관리 등 운영 솔루션을 체험하는 업계 관계자들로 붐볐다. SK텔레콤은 GPU 6만 장 규모의 초대형뿐 아니라 컨테이너처럼 쉽게 쌓아 3개월 만에 구축할 수 있는 20~40㎾급의 모듈형, 고객사 주문 제작형, GPU 구독형까지 총 4종의 솔루션으로 AI 데이터센터 사업을 본격화하기로 했다. 동시에 북미판 AI 에이전트 ‘에스터’의 시장 확대를 위해서도 GTAA 등 글로벌 협력을 늘리기로 했다.
경쟁사들의 행보도 비슷했다. 김영섭 KT 대표는 개막 직후 세계이동통신사업자협회(GSMA)의 개막 기조연설을 참관하며 주요 통신사들과 AI를 포함한 통신 산업의 미래를 논의한 후 주요 협력사들의 부스를 방문했다. 같은 시각 홍범식 LG유플러스 대표는 MWC에서 처음 꾸린 자사 부스를 지키다가 첫 손님으로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맞았다. 유 장관은 AI 주무부처 장관으로서는 3년 만에 현장을 찾아 외교를 통한 기업 후방지원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회동 직후 유 장관은 “엄중한 시기 민관이 같이 위기를 극복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고 전했다.
KT 부스에서는 AI로 생성한 K팝 음악이 흘러나왔고 이에 맞춰 직원들이 수려한 춤동작을 선보이면서 관람객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KT는 ‘K오피스’, ‘K스트리트’ 등 한국 문화와 연계해 다양한 AI를 체험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K오피스에서는 기업의 GPU 자원 관리를 20% 효율화해주는 ‘GPU 할당 에이전트’ 등 마이크로소프트(MS)와 협업한 기업용 에이전트 4종이 공개됐다. 양사는 지난해 말 2조 4000억 원 규모의 AI 파트너십을 맺고 올해부터 AI 모델과 서비스 공동 개발을 통해 시너지를 본격화하기로 했다. LG유플러스는 ‘안심 지능’을 주제로 에이전트 ‘익시오’ 등에 양자암호까지 적용한 AI 보안 기술과 엔씨AI 등과 협업하는 AI 데이터센터 기술을 소개했다.
해외 업체들의 AI 경쟁 열기도 달아올랐다. 특히 중국뿐 아니라 유럽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는 게 참가 업체 관계자의 전언이다. 지난달 10일(현지 시간) ‘파리 AI 행동 정상회의’에서 EU가 AI 규제 완화와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면서 현지 기업들도 사업 추진에 속도가 붙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MWC는 파리 AI 행동 정상회의 직후에 열리는 만큼 유럽과 미국 등의 AI 주도권 경쟁 2라운드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프랑스의 AI 신흥 강자 미스트랄AI의 아서 멘슈 최고경영자(CEO)는 4일(현지 시간) 기조연설에서 회사의 로드맵을 발표한다. 프랑스 통신사 오랑주는 자국 미스트랄AI, 영국 보다폰은 MS의 힘을 빌려 역시 기술력을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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