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PC 게임 플랫폼 스팀(Steam)이 동시 접속자 수 4000만 명을 돌파하면서 업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한국 게임 업체들은 글로벌 게이머들이 모인 플랫폼을 해외 진출 교두보로 활용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강력한 ‘스팀 생태계’에 종속돼 자체 플랫폼 경쟁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5일 스팀의 플랫폼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스팀DB는 지난 2일(미국 시간) 기준 데이터를 공개하면서 “스팀이 처음으로 동시 온라인 접속자 4000만 명을 달성했다”고 밝혔다. 스팀DB가 함께 올린 스크린샷에는 동시 접속자 수가 4001만 7061명으로 나타났다. 4일 현재 시점에서는 최다 동시 접속자 수가 이보다 더 늘어 4027만 명을 넘어섰다.
스팀은 2022년 10월 동시 접속자 3000만 명을 돌파한 이후 약 2년 5개월 만에 1000만 명을 늘리는 기염을 토했다.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스팀은 2015년 10월 1000만 명을 돌파한 데 이어 2020년 3월 2000만 명을 기록했다. 동시 접속자 수 1000만 명을 늘리는 데 걸린 시간은 12년에서 4년 반, 2년 7개월, 2년 5개월로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4000만 명 고지 돌파에 가장 크게 공헌한 건 일본 캡콤 사가 개발한 신작 사냥 액션 게임 ‘몬스터 헌터: 와일즈’다. 지난달 28일 출시된 이 게임은 출시 직후인 이달 1일 최대 138만 명의 동시 접속자를 기록하면서 흥행 기록을 쓰고 있다. 이 게임을 비롯해 꾸준히 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카운터 스트라이크2, 도타(DOTA) 2, 펍지(PUBG): 배틀그라운드 등이 수십만 명의 접속자를 유지하며 뒤를 받치고 있다.
스팀은 미국의 밸브 사가 운영하는 세계 최대 PC 게임 플랫폼이다. 인디 게임부터 트리플A(거대 개발비가 투입된 대작)급 게임까지 수만 개의 게임을 갖추고 있다. 정기적으로 정가의 최대 90%까지 할인하는 공격적인 프로모션 전략을 앞세워 게이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게임 커뮤니티 기능, 게임 평가 시스템까지 활성화하면서 대체 불가한 게임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게임 업계의 대세로 자리잡은 ‘멀티 플랫폼’(PC·콘솔 등 다양한 기기에서 동시 출시) 흐름 또한 스팀의 영향이 미쳤다는 평가다. 스팀을 중심으로 모인 PC 게임 이용자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콘솔 게임사들이 독점 전략을 쉽게 실행할 수 없게 된 탓이다. 게임 개발사로서는 콘솔의 영향력에 묶이지 않고 이용자층을 PC로 확대할 수 있어 긍정적이다.
스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국내 게임 업계도 맞춤형 전략을 세우고 있다. 넥슨, 넷마블(251270), 카카오게임즈(293490) 등 주요 게임사들의 경우 전통적으로 자체 플랫폼을 통해 게임을 서비스했지만 최근에는 스팀을 통한 출시가 늘어나는 추세다.
넥슨은 ‘퍼스트 디센던트’를 지난해 스팀에서 출시한 데 이어 올해 최대 기대작인 ‘퍼스트 버서커: 카잔’의 체험판을 공개했다. 크래프톤(259960)의 배틀그라운드는 여전히 스팀 최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인기 게임이다. 시장에서 주목받기 어려운 인디 게임 개발사들 또한 스팀을 통해 쉽게 게임을 출시할 수 있어 대형 배급망을 갖춘 퍼블리셔를 구하지 않아도 성공 기회를 모색할 수 있다.
다만 이 같은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게임 업계 일각에서는 스팀에 대한 플랫폼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진다는 점에서 과제가 남는다는 반응을 보인다.
가장 큰 우려는 게임사들이 스팀을 선호할수록 국내 플랫폼 업계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게임 업계 관계자는 “인기 있는 자체 게임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한 게임사들도 스팀에 밀려 이용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게임사들이 자사 플랫폼보다 스팀을 통한 출시를 선호하는 경향도 나타난다”고 말했다.
플랫폼 의존도 심화로 국내 개발사의 개발비 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스팀은 기본적으로 매출의 30%를 플랫폼 수수료로 가져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전에는 개발사와 수계약을 맺고 수익을 나누는 방식이었지만 스팀의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높은 수수료를 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독과점 수준인 플랫폼 영향력이 더욱 강해질수록 개발사들의 부담도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스팀이 해외 플랫폼인 탓에 이를 통해 국내 규제를 우회하는 통로로 작동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례로 한국 정부는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공개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스팀을 통해 해외 출시 게임인 것처럼 유통하면 규제를 적용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 구글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마켓 플랫폼 독과점으로 인해 모바일 게임 개발사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비슷한 사례가 PC 게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며 “스팀의 긍정적인 면을 잘 활용하되, 국내 게임 플랫폼의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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