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국가별 무역적자는 대만이 741억 달러로 한국(658억 달러)을 크게 웃돌았다. 그런데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현지 시간) 유독 한국만 거론하며 반도체지원법(칩스법) 폐지까지 주장한 것은 결국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등 국내 기업에 추가 투자를 압박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전날 TSMC는 미국 내 1000억 달러 추가 투자를 발표했는데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서 대만이 사라진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의 반도체 보조금 재협상 발언에 놀랐던 국내 기업들은 이날 한 발 더 나아가 반도체법 폐지를 시사하자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미국 반도체법에 따라 현지 생산 시설에 투자한 삼성전자는 47억 달러(약 6조 8100억 원), SK하이닉스는 4억 6000만 달러(약 6600억 원)의 보조금을 받기로 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의 말대로 법 폐지가 현실화하면 국내 기업들은 보조금 규모만큼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370억 달러(약 54조 원)를 들여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시설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는 이미 수년간의 공사 끝에 내년 공장 가동을 앞둬 투자를 되돌릴 수도 없다.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SK하이닉스 역시 보조금 수령 규모에 맞게 팹(생산 공장) 구축을 진행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발언이 반도체 관세 부과와 맞물려 한국 반도체 기업들로부터 추가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포석으로 보고 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업에) 중요한 것은 관세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라며 “그래서 미국에 (생산 시설을) 건설하고 있고 많은 다른 회사들이 오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돈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TSMC가 전날 최소 1000억 달러(약 145조 원)의 추가 투자를 발표한 가운데 이날 대미 흑자가 한국보다 높은 대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던 점도 이 같은 시각에 힘을 싣는다.
문제는 국내 기업들은 지원금 없이 미국에 대한 추가 투자가 부담스럽다는 점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미국 근로자 임금 등을 비롯해 미국은 국내·중국 등에 비해 생산 비용이 높아 보조금 없이는 추가 투자가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국내 반도체 업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 셈이다.
국내 자동차 업계 역시 그간 집행해온 미국 투자가 말짱 도루묵이 될 위기에 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전기차 보조금을 ‘미친 전기차 의무 규정’라고 말하며 보조금 폐지 의사를 재확인했다. 현재 미국 정부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전기차 한 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90만 원)의 보조금을 세액공제 형태로 지급한다. 현대자동차는 이 혜택을 노려 조지아주에 약 76억 달러(약 11조 원)를 투자해 전기차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현대차(005380)그룹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를 지난해 10월부터 부분 가동하고 있다.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가 늘어나면 보조금 혜택을 받고 시장 경쟁력은 향상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보조금 폐지를 거론하면서 미국 시장에서 판매량을 늘릴 중요한 인센티브를 잃게 될 상황에 놓였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현재 현대차·기아의 전기차들은 보조금을 받지 않고 있지만 받게 되면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일 강도를 더해가는 ‘트럼프 2기’의 압박 속에 정부와 국회의 역할론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날 새롭게 한국반도체산업협회장에 오른 송재혁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이제 반도체 산업은 개별 기업의 힘만으로는 절대 이겨낼 수 없다”며 “‘팀 코리아’처럼 하나의 팀이 돼 움직여야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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