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5일 연례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정치협상회의)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식에서 미국과의 기술 패권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휴머노이드 로봇과 6세대(6G) 이동통신 등 최첨단기술 용어를 전인대 정부공작보고(업무보고)에 처음으로 담으며 ‘첨단산업 굴기’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최근 민영기업 지원에 박차를 가하며 적극 지원하는 가운데 이날 샤오미와 하이얼 등 주요 거대 기술 기업(빅테크)의 최고경영자(CEO)들도 전인대 개막식에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중국 정부 홈페이지인 중국정부망에 따르면 이날 업무보고에 ‘체화 지능(물리적 실체를 갖고 실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인공지능)’과 6G, 휴머노이드 로봇, 인공지능(AI) 스마트폰·PC 등의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미국과의 기술 패권 전쟁에서 뒤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동시에 미중 무역 전쟁으로 경제가 타격을 입게 되는 상황에서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전환해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중국은 딥시크 열풍으로 탄력을 받은 올해 과학기술 분야에 전년 대비 10% 늘어난 3981억 위안(약 80조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지난해 연구개발(R&D) 투자액이 3조 6130억 위안(약 723조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올해 중국은 R&D 분야에만 800조 원 이상을 쏟아붓는 셈이다.
리창 국무원 총리는 이날 “AI 플러스(AI+) 행동을 지속 추진하고 디지털 기술과 제조업의 우위, 시장의 우위를 더 잘 결합하며 스마트 커넥티드 신에너지차와 AI 스마트폰·PC, 휴머노이드 로봇 등 차세대 스마트 단말기와 스마트 제조 설비를 크게 발전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은 지난해 전인대 업무보고에서 국가 차원의 AI 종합 지원 강화책인 ‘AI+ 행동’을 처음 제시했다. AI를 경제·과학·공공서비스·의료·교육·복지 등 다양한 분야와 통합해 발전을 촉진한다는 개념이다. 중국은 2030년까지 AI 이론과 기술·응용을 전반적으로 세계 선두 수준에 올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과의 AI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하겠다는 목표가 올해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제시된 셈이다.
전인대 대표들과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들 사이에서도 AI가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레이쥔 샤오미 CEO는 이날 전인대 개막식에 참석해 “선진적인 AI 기술을 각 단말기에 응용해 수많은 소비자가 과학·기술이 가져온 아름다운 생활을 누리게 하고 중국식 현대화에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5년간 당초 계획한 1000억 위안(약 20조 원)을 넘어 1050억 위안(약 21조 원)을 R&D에 투자했다고 밝혔다. 중국 가전 기업 하이얼의 저우윈제 CEO 역시 전인대 대표로 참석해 “하이얼은 앞으로 본업에 충실하고 스마트홈과 산업 인터넷, 헬스케어라는 세 갈래의 경주로에서 제조업 강국 건설에 힘을 보탤 것”이라며 “AI는 중국 기업의 시대적 기회로, 더 많은 중국 기업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브랜드를 만들어낼 것이라 믿는다”고 강조했다.
기술혁신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장기간 내수 침체가 이어지는 만큼 중국이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로 제시한 ‘5% 안팎’ 달성은 상당한 도전 과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더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으로 미중 무역 전쟁이 격화한 상황에서 수출이 감소하고 내수가 충격을 받게 될 것이 확실시된다. 이러한 상황을 의식한 중국 정부는 올해 소비자물가지수(CPI) 증가율 목표를 2004년 이후 처음으로 3%에 못 미친 ‘2% 안팎’으로 설정하고 수요 둔화를 기정사실화했다.
내수 침체 극복은 지난해 업무보고에서 10대 과제 중 세 번째에 올랐지만 올해는 맨 앞에 내세우면서 중국 당국의 고민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리 총리는 이를 위해 3000억 위안(약 60조 원) 규모의 초장기 특별국채를 투입해 소비재 이구환신(낡은 제품을 신제품으로 교체하도록 지원하는 정책)에 쓰고 중앙정부 예산 7350억 위안(약 147조 원)을 들여 국내 투자를 이끌겠다고 밝혔다.
올해 재정적자율 목표는 역대 최고인 국내총생산(GDP)의 4%로 책정했다. 한층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돈 풀기에 나서 경기 둔화를 막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국방 예산 증액 폭은 7.2%로 4년 연속 7%를 넘었다. 실업률 목표와 신규 고용 인원은 각각 전년과 동일한 5.5%, 1200만 명으로 설정했다.
한편 이날 중국은 일방주의·보호주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각을 세우기도 했다. 리 총리는 업무보고에서 “우리는 패권주의·강권정치에 반대하고, 모든 형식의 일방주의·보호주의에 반대하며, 국제적 공평·정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관련 언급은 지난해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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