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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임금 판결 ‘노사관계 사법화’…입법으로 명확히 규정해야[청론직설]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노동개혁, 사회적 합의와 규제 개편, 법 개정 병행해야

경사노위 노동자 몫 노총에 집중 ‘제도의 함정’에 빠져

계속고용 근로조건 명확히 규정, 기업 유연성 높여야

AI 기술 발전, 고용과 임금·보상체계 변화 고민 필요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이 17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대 간 고용 갈등을 해소하려면 노동시간 선택의 자유를 주고 경직적인 임금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승현 기자




노동시간 유연화, 임금체계 개편, 계속고용 등 노동 개혁 이슈들이 계엄·탄핵 정국과 조기 대선 가능성에 파묻혀버렸다. 정치권에 휘둘리는 한국의 노동시장에 대해 미국 헤리티지재단은 경직된 근로시간과 고용 규제 등을 들어 ‘부자유’ 등급으로 평가했다. 사실 노동 개혁 방향의 모범 답안은 이미 나와 있다. 노동시장 및 근로시간의 유연성 제고,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 등 개혁 과제가 명확하다. 그러나 노사 대립과 정치권의 벽에 부딪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노사 관계와 산업 현장의 법치를 내세우며 노동 개혁에 나섰던 윤석열 정부도 ‘주69시간 근로’ 논란에 휘말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17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노동 개혁을 하려면 사회적 합의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용부 장관 2년 3개월의 시행착오를 의식한 듯 “노사가 대화하면서 정부는 제도를 현실에 맞게 개편하고 국회는 법을 만들어야 개혁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 개혁을 정리한다면.

△정부가 추진해온 노동 개혁의 목표는 노사 법치에 기초해 상식과 공정의 노동시장과 노사 관계 구축이다. 핵심은 임금체계와 노동시간 시스템의 공정성과 유연성을 높여 고용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현재의 노동시간과 임금 시스템은 고도성장기 제조업 중심 경제에는 적합했지만 디지털 경제와 창의성이 요구되는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1953년 6·25전쟁 직후 제정된 노동법의 골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임금체계와 노동시간 개편의 방향은.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이 부족하고 연공과 근속 중심으로 운영되는 임금구조로는 중장년층의 계속고용이 어렵다. 내부자를 보호하는 반면 신규 입사자의 진입 장벽이 높다. 세대 간 고용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스템은 고용 불안과 경쟁력 악화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노동시간 선택의 자유를 주고 경직적이고 획일적인 임금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사회적 대화의 근본적 고민이 필요하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노사정 대타협을 했다. 경제위기 때문에 가능했다. 모두 망할 정도의 위기를 맞지 않으면 우리나라 노사관계나 정치, 문화, 권력 구조 등에서 사회적 대타협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회적 대화의 방식과 내용에 정답은 없다. 노사가 직접 참여, 전문가와 노사를 포함, 전문가가 먼저 논의하고 노사가 의견을 듣는 방식 등 다양한 방안이 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사회적 대화의 제도화를 위한 것 아닌가.

△사회적 대화에 기업과 근로자를 참여시키기 위해 법으로 만든 게 경사노위다. 정책의 입안과 집행 과정에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런데 고용정책, 산업 안전 등 개별 사항마다 노사 간 대화만 강조하다 보니 ‘제도의 함정’에 빠졌다. 근로자 몫이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양대 노총에 집중됐다. 경사노위가 아니면 사회적 대화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양대 노총이 참여해야 한다는 전제가 생겼다.

-통상임금 문제로 시끄럽다.

△10년 전 GM 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통상임금 해결을 투자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을 정도로 이 문제는 기업들에 난제다. 입법 미비로 노사 갈등과 소송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이번에 대법원이 2013년 판결에서 통상임금의 요건 중 하나인 고정성 기준을 폐지했다. 정기성·일률성·고정성 가운데 고정성에 대한 하급법원들의 도전이 계속되자 대법원이 판결의 잘못을 인정했다.

-고정성 폐지 이후 후폭풍이 거세다.

△대법원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아니다’식의 판결을 했는데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추가 인건비 부담을 연 7조 원 정도로 추정했던데 비용보다 추가 소송이 문제다. 소급 적용은 되지 않지만 대법원에 계류된 소송과 소급분 반환 소송이 이어질 수 있다. 핵심은 ‘노사 관계의 사법화’ 문제다. 노사 합의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사사건건 법원에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중소기업 등에서는 ‘통곡임금’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해결 방법은 없는가.

△대법원이 현행 법과 제도보다 빠른 변화를 만들면 현장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법의 빈 틈을 법원의 판례로 채우면 안 된다. 통상임금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 노사의 자발적이고 대등한 합의에 대해서는 정부가 보증을 해주는 방법도 있다. 노사 모두 합의를 악용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다.

-계속고용 논의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다.

△4월 공익위원 검토 의견 마감이라는데 뾰족한 대안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최근 정년 연장 설문 조사 결과 20대의 80.7%가 찬성했다고 한다. 20대가 정년 연장에 동의하는 것은 부모 세대에 대한 부양 부담 때문이다. 결국 계속고용은 서민들의 민생 안정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대기업은 이미 노사 합의를 통해 퇴직 후 재고용 등이 시행되고 있다.



-연공급 임금체계가 계속고용의 걸림돌로 지목되는데.

△노사의 자율적 계속고용을 확산하려면 근로조건 조정에 대한 법적 근거를 명확하게 규정해서 기업 내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 생산성과 괴리된 강한 연공급 임금체계, 전보나 전직과 같은 배치 전환도 바꿔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컨설팅 재정 뒷받침 등 지원에 국한하고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

-일본을 벤치마킹하겠다고 언급했다.

△일본은 우리보다 20년 전에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2006년 법을 만들어 재고용을 하든 정년을 없애든 정년을 늘리든 선택한다. 현재 일본 기업의 99.9% 사업장이 선택을 완료했다. 법으로 일률적으로 정할 것이 아니라 기업에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노동 불안에 대한 우려가 크다.

△AI 기술이 우리 직장, 사업장에 침투하면서 필연적으로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 수밖에 없다. AI 실업이라는 말이 나온다. 아직은 AI가 본격적으로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가지는 않지만 직무의 성격에는 변화를 주고 있다. 그렇다고 초조해하거나 아등바등할 필요는 없다. 변화에는 혁신이 따라온다. AI로 인한 고용 감소를 우려해 기술 도입을 반대할 것이 아니라 도입 기술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노동자들이 잘 적응하는 방향으로 대응해야 한다.

-AI가 노사 관계도 변화시키지 않을까.

△고용과 임금 및 보상 체계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 과거와 달리 AI는 단순 업무뿐 아니라 창의적 업무까지 한다. 협업으로 생산성을 극대화했을 때 사람의 영역을 어디까지 설정할지 등 고민할 게 많다. 휴머노이드가 확산되면 중대재해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첫 고용부 장관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주52시간 개편이다. 꼼꼼하게 챙겼어야 했다. 69시간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설익은 대책이라는 비판에도 정리해야 했다. 그랬다면 반도체 연구개발(R&D) 주52시간 예외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로시간 개편은 반드시 추진돼야 한다. 주 단위에서 월·분기·반기로 확대하고 근로시간 저축제 등을 도입해 탄력근로제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현실에 맞지 않는 제도는 암시장을 형성한다. 노동시간 왜곡과 불법·편법이 이뤄지면 결국 노동자가 손해다. 근로시간 개편은 정부가 노동자의 이익을 최대한 보완해주는 장치다.

-반도체 주52시간 근무 예외를 고용부가 지침 개편으로 우회 적용하기로 했는데.

△고육지책이다. 오죽하면 꼼수라는 비판을 알면서도 했겠는가. 입법이 안 되니 행정 지침으로 급한 불을 끈 것이다. 법으로 해결해야 뒷말이 없다. 반도체특별법과 함께 근로시간 유연화를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 역시 필요하다. 반도체만 연장근로가 필요하겠나. 조선이나 배터리 분야에서도 필요하다. 그때마다 행정 지침을 바꾸기는 어렵다.

-조기 대선을 준비하는 야당에서 다시 ‘노란봉투법’ 등을 꺼냈다.

△특정 소수 노동조합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감면하고 기득권을 강화해 노동 현장의 갈등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고 있다.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사용자 정의 확대, 손해배상책임 제한 등 세세한 부분별로 다시 논의해야 한다.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밀어붙이는 대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

-요즘 고민하는 노동시장 문제는.

△청년 고용 문제가 심각하다. 2월 통계에서 15~29세 청년 중 ‘쉬었다’는 응답이 50만 명을 넘었다. 실업률이 낮고 전반적인 노동시장 상황이 양호한데도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것은 청년들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성장률 하락과 고물가·고금리·고환율, 글로벌 관세 전쟁 등 대내외 경제 여건이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가 블랙홀이 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노사 신뢰와 협력이 중요하다. 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고통 분담도 요구된다.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미래 세대인 청년들을 위해 노동 개혁을 중단 없이 추진해야 한다. 정치권이 정파적 이해를 넘어 대안을 찾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다.

◆He is…

1961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에서 30년간 활동한 노동문제 전문가이다.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사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건설교통부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냈다. 이후 한국노총 사무처장과 노사발전재단 사무총장을 거쳤다. 이어 윤석열 정부에서 2년 3개월 동안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내며 노동 개혁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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