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창작한 예술의 소유권 등을 둘러싼 논쟁이 세계적으로 거센 가운데 ‘AI 예술’의 새 경계를 탐구하는 색다른 작품들이 한국을 찾았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전시 중인 프랑스 아트그룹 오비어스(Obvious)의 작품들이다. 오비어스는 사람의 뇌파가 처리하는 수천 장의 이미지에 대한 시각적 정보를 자기공명영상(MRI) 장치로 읽어 머신러닝(기계학습) 시킨 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람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구현한다. 다시 말해 ‘마인드 투 이미지', 상상을 시각 현실로 만든 예술인 셈이다.
오비어스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31살 동갑내기 피에르 포트렐, 위고 카셀레스-뒤프레, 고티에 베르니에 세 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모두 예술 관련 학문 베이스나 경력이 없다. 그러나 2017년 의기투합한 오비어스의 ‘AI 예술’은 이듬해인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돼 곧장 주목을 받았다. 14~20세기에 그려진 초상화 데이터 1만 5000여 개를 학습해 완성한 ‘에드몽 벨라미의 초상’이 추정가의 수십 배를 웃도는 43만 2000달러(약 5억 원)에 낙찰되며 단숨에 유명세를 얻은 것이다. 이후 오비어스는 자신들의 작업이 단순한 ‘AI 작품’을 넘어 예술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정체성과 정통성을 갖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발견한 사조가 ‘초현실주의’다. 100년 전 탄생한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과 결합해 논리적 질서를 뛰어넘으려 한 운동이다. 카셀레스-뒤프레는 “초현실주의는 의식적 개입 없이 자유롭게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자동기술법’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고자 했던 시도”라며 “새로운 기술(AI)로 인간 정신에 관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구현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추구하는 바가 같았다”고 설명했다.
8일부터 열린 전시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지평 : IMAGINE’에서는 AI를 통해 100년 전 초현실주의를 현대로 불러오려는 도전을 만날 수 있다. 자동기술법으로 쓴 시구를 토대로 펼친 이들 예술가의 상상을 초현실적 이미지로 풀어낸 풍경화 작품 14점이 대표작이다. 기계가 읽은 인간의 내면 세계와 자연의 경계를 탐구한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탐구한 초상화 시리즈 9점도 전시된다. 불안, 기쁨, 공포, 우울 등 복잡한 감정 상태를 AI가 어떻게 해석하고 시각화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 실시간으로 시를 생성하는 AI 설치물과 관객 아이디어를 즉석에서 그림으로 구현하는 ‘엑스퀴지트 코프스’ 프로젝트 등도 체험할 수 있다.
‘AI 예술’이라고 하면 기계가 손쉽게 생산해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비어스의 작업은 사뭇 다르다. 초현실주의 이미지를 볼 때 만들어지는 뇌파를 시각적으로 패턴화해 학습하는 과정은 지난하고, 상상으로 생성한 수천, 수만 장의 이미지 중에서 작품을 고르는 일도 한참 걸린다. 실제 생성 이미지 중 작품이 되는 비율은 1만 분의 1 수준이라고 한다. 창작의 모든 과정에 걸쳐 수많은 ‘예술적 개입’도 이뤄진다. 포트렐은 “AI가 생성한 이미지를 어떻게 물리적으로 구현해낼 것인지가 우리의 관심사였다”며 “작품의 색과 질감, 표현 기법과 인쇄, 액자의 형태까지 모든 점을 심사숙고해 결정했다”고 말했다. 실제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은 300g 특수 질감 용지에 4가지 블랙 딥잉크를 활용한 이중 인쇄 방식으로 제작됐고, 서명으로는 고유 값을 가지는 AI 모델의 손실 함수가 기재됐다.
전시가 48년 전통의 한국 1세대 갤러리인 선화랑에서 기획됐다는 점도 주목된다. 원혜경 선화랑 대표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아트신에서 전통 화랑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한 결과”라며 “앞으로도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화랑 측은 작품 옆 설명(캡션)을 꼼꼼히 읽는 것이 이번 전시를 즐기는 비법이라고 귀뜸했다. 5월 3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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