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본래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만, 어떤 미술은 덜 보여줌으로써 더 깊은 감각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추상화가 김이수의 작업이 그렇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조은숙갤러리에서 한창인 개인전 ‘앵프라맹스-인카운터(Inframince-Encounter)’에서 작가는 ‘무엇을 그렸는가’에 답하지 않고 ‘무엇을 느꼈는가’를 묻는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대형 회화들이 내뿜는 푸른 색조가 공간을 압도한다. 바다가 펼쳐진 듯 하늘로 떠오른 듯, 자연에 안기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이 작업의 본색은 그림 가까이서 음미해야만 한다. 아주 미세한 겹겹의 선들, 아니 선이라기보다 흔적에 가까운 미묘한 색의 ‘결’이 차르르 전개된다. 그 수직의 배열은 마치 바다와 하늘 사이에 선 인간의 존재처럼 여리지만 분명히 인식된다.
김이수가 십수년 째 천착해 온 ‘앵프라맹스’의 감각이다. ‘현대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이 제시한 ‘앵프라맹스’는 너무 미세해서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의 차이, 즉 인식의 경계에 대한 개념이다. 김 작가는 이 ‘지각 불가능에 가까운 얇음’을 향해 간다.
작가는 초기에 석고붕대와 연필 드로잉, 플렉시글라스, 낚싯줄, 반투명 테이프 등 실험적인 재료를 사용했고 이후 마스킹테이프를 이용한 그리기로 회귀했다. 작업 방식은 치밀하고 반복적이다. 마스킹테이프를 붙였다 떼며 직선의 면을 만들어 포갠다. 붓질은 일정한 방향으로 수십 차례 겹쳐진다. 겹침의 정도에 따라 색의 농도가 달라지고, 화면에 미묘한 그라데이션이 생긴다. 면과 면이 서로 맞닿는 자리에 선이 놓이고, 선들이 쌓여 면이 되는 미세한 풍경이다. 반복된 겹침은 평면 위에 쌓이는 시간과 밀도가 된다. 하나의 화면은 겹침의 깊이로 완성된다.
작품은 ‘단색화’처럼 보이고, 수행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는 ‘단색화 방법론’과도 닮아있다. 김이수가 ‘후기 단색화’ 작가군으로 분류되는 이유다.
2년간 준비한 신작들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메인 컬러로 초록에 가까운 푸른색을 택했다. 그간 색을 절제해 온 작가가 계절을 고려했다. 그에게 색은 표현이라기 보다는 기운이며, 내용의 전달보다는 인식의 환기다.
이번 전시는 여러 의미에서 새로운 시도가 많다. 철저하게 계획적이고 중립적인 작품만 선보이던 작가가 일필(一筆) 드로잉을 시도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단숨에 그린 푸른 드로잉들이다. 그간 꼭꼭 숨겨두다시피 한 작가의 존재와 행위 흔적을 마주할 수 있다.
선명한 붉은 색부터 짙은 푸른색까지 빛의 스펙트럼처럼 변화하는 소품 연작도 흥미롭다. 앞으로 선보일지도 모를 색채 가능성에 대한 예고편 같다. 전시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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