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 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한 자동차 및 전기 전자 부품 제조 업체 A사가 최근 법원에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어음을 갚지 못해 당좌거래가 정지된 지 불과 이틀 만의 일이다. 과거 특허 기술을 기반으로 정부의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이노비즈)’ 인증을 받았고 2023년 기준 연간 매출액이 300억 원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지만 최근 국내에 불어닥친 미국발 관세 위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A사의 한 관계자는 30일 “법원에서 회생절차 개시 결정이 나 현재는 회생 계획 인가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며 “수주 물량이 급격히 물면서 경영이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제조업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이 현실화하면서 수출과 수주가 모두 감소하는 이중고가 나타나고 있다는 게 국내 제조 업체들의 하소연이다. 그나마 위기에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체력을 갖춘 대기업들은 상황이 괜찮지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부품 업체들은 생존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자동차 부품사들의 경영난이 심각하다. 경남 김해 소재 자동차 엔진 부품 제조 업체 B사도 이달 중순 당좌거래가 정지당했다. A사를 포함해 이달에만 자동차 부품 제조 업체 2곳이 약속한 기한 내 어음을 갚지 못해 부도가 난 것이다. 당좌예금은 수표·어음을 발행할 수 있는 기업의 ‘마이너스 통장’이다. 통상 부도가 2번 이상 발생하면 당좌거래가 정지된다. A사처럼 기업회생절차를 밟거나 폐업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 관세’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6일(현지 시간) 모든 수입 자동차에 대해 4월 2일부터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자동차 부품에 대해서는 5월 3일을 전후로 25%의 관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미 자동차 부품 수출액은 82억 2000만 달러(약 12조 원)로 전체 자동차 부품 수출액의 36.5%에 달했는데 이 수출분이 고스란히 타격을 받게 되는 셈이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내수도 부진한데 수출까지 감소하면 국내 부품 업체들은 고사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27일 개최한 자동차 산업 긴급 회의에서 “(관세 적용 시) 완성차 회사뿐만 아니라 부품 기업의 어려움이 특히 클 것으로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미국이 한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할 경우 자동차뿐만 아니라 반도체·의약품 등 제조업 전반이 장기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통계청이 4일 발표한 ‘1월 산업활동 동향’에 따르면 이미 1월 제조업 생산은 전년 동월 대비 4.2% 급감한 상태다. 2023년 7월(-6.6%) 이후 1년 6개월 만에 가장 크게 감소한 것으로 생산이 쪼그라들면서 제품 출하까지 7.4%나 줄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4월 제조업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전망치는 92로 1년 1개월 연속 기준선인 100을 하회하고 있다. BSI 전망치는 기업 경영 전망을 가늠하는 지표로 100보다 낮으면 경기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미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은 최근 2분기 아시아태평양 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기존 2%에서 1.2%로 0.8%포인트나 하향 조정하고 “미국의 관세정책이 지속될 경우 한국 경제는 장기적인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다음 달 초 자동차 산업 비상 대책을 시작으로 연내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 소부장 경쟁력 강화 기본 계획 등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한경협 관계자는 “최근 반도체·자동차 등 우리나라 주력 산업이 전례 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며 “정부가 보조금, 세제 지원 등의 산업 지원 방안을 미국·일본 등 경쟁국 수준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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