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역대 대통령 탄핵 심판 중 최장 기록을 넘어서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시대 경제, 외교·안보 측면에서만 보면 아직까지 우리나라만 피해를 보는 일은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찌감치 정상회담을 하며 눈도장을 찍은 일본 등에도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고 자동차와 상호관세도 예외 없이 부과할 태세다.
그렇다고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이미 예고된 악재들이 많은 만큼 국정 공백 사태가 길어질수록 상황은 악화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 2일(현지 시각)부과할 상호관세와 관련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는 (협상에 대해) 열려 있다”며 ‘선(先)부과 후(後)협상’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은 앞다퉈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 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맞대응을 예고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조차 이달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전화 통화를 갖고 협상의 여지를 남겨뒀다. 트럼프 대통령이 통화가 끝난 뒤 “매우 생산적인 내용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반면 국정 공백 사태가 길어지고 있는 한국은 상황이 좋지 않다. 협상이 지연될수록 우리 기업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정부로부터 받기로 한 반도체 보조금 수령 문제가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로 위협하면 기업들이 알아서 미국에 공장을 짓는데 왜 우리 세금으로 해외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냐’며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백악관에서 210억 달러(약 31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위대한 회사’라고 치켜세웠지만 현대차그룹의 현지 공장 준공식날 자동차 관세를 전격 발표했다.
외교·안보 분야도 마찬가지다. 당초 한국 방문을 검토했던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한국을 패싱하고 아시아 순방에서 일본·필리핀만 찾았다. 이에 앞서 미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털시 개버드 국가정보국(DNI) 국장도 최근 일본, 태국, 인도,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한국은 찾지 않았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는 미국 에너지부(DOE)의 한국 ‘민감 국가’ 지정, 관세 등을 거론하며 “한미 동맹이 조용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답답한 점은 현재의 체제로는 트럼프 행정부와 종합적인 협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강력한 국정 컨트롤타워를 중심으로 통상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기획재정부가 부처 칸막이를 허물고 미국과 주고받을 협상 세부안을 놓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대통령 권한대행에서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일례로 한국수력원자력은 올 2월 미국 핵연료 공급사 센트루스로부터 10년간 저농축우라늄을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액수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안타깝게도 정부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이 카드를 제대로 쓰지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에 들려오는 한국 관가 이야기는 더욱 착잡하다. “부처 고위직 입장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탄핵 심판 결과에 따라 거취가 보장되지 않다 보니 힘 빠진 분위기가 역력하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면 옷벗을 일만 남았고 기각되더라도 분위기 쇄신용 개각으로 거취가 불투명해 열심히 일할 유인이 적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대한민국의 리더십 부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시스템 안에서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차 석좌가 언급한 ‘조용한 위기’는 외교 안보를 넘어 대한민국 시스템 전반을 엄습하고 있다. 조용한 위기가 대한민국 전체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외교력과 민관의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기민하게 대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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