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미닫이문을 가슴으로 치고 들어가는 순간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한다. 표적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갈겨댄다. 정통 서부극 죽음의 막장, 이것이 전형적인 미국식 협상이다. 현대 미국식 협상은 다른 나라나 문화권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하다. 기존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처음부터 직설적으로 대뜸 높은 값을 부른다. 협상을 주도하는 개인의 권한과 재량이 크고 협상 과정에 효율과 시간을 중시한다. 장기적 관계보다는 단기 이익에 꽂힌다. 명확한 합의와 서면계약을 필수로 하고 서명하면 그대로 칼같이 집행하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 후 그가 언급한 사안들로 흔들리지 않는 영역이 없을 정도다. 미국을 위대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세계질서를 새로 짜려고 나선 듯하다. 새로운 계층제를 만들려고 한다. 제일 높은 곳에 미국이 있고 그 아래 중국과 러시아가 현재 등단해 있다. 그 아래층은 혼성층인데 자원이 있거나 위협이 통하거나 반민주적 질서가 구축된 나라들이다. 우크라이나·그린란드·파나마·이란·북한 등 여러 나라가 있는 모양새다. 그리고 네 번째 계층이 의존과 충성으로 결합한 정통 동맹국들이다.
3단계나 4단계에 속하는 나라들을 대하는 양태는 전형적인 미국식 협상 방식이다. 조 바이든이 보조금이라는 유인책을 활용해 기업 리쇼어링을 도모했다면, 트럼프는 관세라는 무기로 내리치는 형국이다. 그에게는 경제는 제조업밖에 없고 산업은 돈으로 환치된다. 관세가 가지는 어두운 측면을 무시하고 쏟아내는 언급이나 다른 나라의 부가가치세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제대로 된 보좌를 받지 못한다는 인상도 주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딜은 딜이고 힘이 실린 무기다. 외면할 수 없다. 우리 나름의 자신 있는 협상 방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일반론이지만 우리는 사전 협상을 중시하고 신뢰 기반을 돈독하게 다지고 기존 관계의 계속성을 중시한다. 정서적인 접근도 중시해 다양한 채널을 가동한다. 그리고 유연하게 상황에 적응하며 융통성도 발휘한다. 또 결단도 유효하게 구사한다. 이미 시작됐다. 현대자동차가 통 큰 투자를 약속했다. 트럼프는 옆에 서서 ‘돈이 뭉치로 굴러들어 온다’며 ‘그레이트’를 연발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사업 계획에 상황을 직면한 결단이 묘수로 작동한 것이다.
국내 상황이 어렵지만 가능한 수륙양용 접근을 모두 시도해야 한다. 기관이나 제도 중심의 협상보다는 트럼프의 개인기 딜 방식이 기회일 수 있다. 미 의회의 통제를 받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와는 자유무역협정(FTA)의 기억과 성과를 잘 살려야 할 것이다. 기술 경쟁력이 있는 분야는 대담하게 수용하면 윈윈할 수도 있다. 미국 빅테크들의 요구에 대해서도 그것에 결합 이득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그동안 혈맹의 경지에서 아태지역 동맹으로서의 기여를 계량적·금전적으로 파악해 제시할 준비를 해야 한다.
유럽처럼 보복관세를 부과하고 세계무역기구(WTO) 제소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다자무역 체제 수호나 관세장벽의 완화를 통한 공동 번영과 같은 기존의 제도와 규범을 지키자는 목소리는 대응 논리로서 글로벌 발언권을 얻을 것이다. 네 번째 계층에 속하는 나라들과의 공동 보조는 앞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며 시간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진행돼야 한다. 연기가 사라지면 합리성을 좀 회복하는 것이 미국 서부영화의 특징이다. 보편적으로 볼 때 시간은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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