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5%의 자동차 관세를 계속 부과하기로 하자 현대차·기아도 하반기부터는 미국 판매 차량의 가격 인상을 추진하기로 했다. 미국 내 생산 차량으로 판매 물량을 모두 대체할 수 없는데 관세 인상분을 가격에 반영하지 않으면 수익성 악화는 물론 예기치 않은 통상 문제까지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북미 공급망을 조정해 미국 내 생산 차량을 최대한 늘리고 경쟁사의 가격 조정에 대응하며 가격 인상 폭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14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기아는 최근 기관투자가들을 만나 하반기 이후에는 미국 판매 가격을 올리는 방안을 언급했다. 상반기까지는 미국에 미리 수출해둔 재고 물량 등으로 관세를 피할 수 있지만 하반기에는 더 이상 관세 쇼크를 흡수하기 어렵고 비용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25%는 고율의 관세여서 가격에 반영하지 않으면 그간 수출 가격의 적정성에도 의문이 생길 것”이라며 “하반기에는 차값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전했다.
실제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이 이달 초 서울모빌리티쇼에서 기자들을 만나 관세 부과에 대해 “미국에서 가격을 인상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지만 현대차 미국 법인의 가격 동결 시한은 6월 2일로 확인됐다. 송호성 기아 사장 역시 “(미국에서) 당장 가격 인상 계획은 없다”고 밝히면서도 유연한 시장 대응을 강조한 바 있다.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를 굽히지 않고 고율 관세 부과를 지속하면 가격 인상에 나선다는 시그널이다. 현대차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미 측이 예고대로 다음 달 3일부터 자동차 부품까지 25% 관세를 부과하면 미국 내 생산 자동차의 원가도 뛸 수밖에 없어 6월 이후에는 판매 가격이 인상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미국에 진출한 완성차 업체별로 관세 부담을 회사와 소비자가 어떤 비율로 부담할지를 두고 고민이 클 것”이라며 “가격 인상에 대한 소비자 저항이 낮은 프리미엄 차급부터 가격 인상이 이뤄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현대차·기아는 경쟁사보다 먼저 가격을 올리는 것은 자제한다는 계획이다. 관세 부담을 소비자에게 앞장서 전가한다는 인상으로 최근 호조세를 보이는 미국 시장에서 피해를 입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미국에서 약 171만 대를 판매해 단일 시장 기준으로 최대 판매처다.
이 때문에 현대차·기아는 글로벌 생산 거점을 활용한 공급망 조정 등으로 관세 부담을 최소화해 가격 인상 폭을 줄이려 애쓰고 있다. 양 사는 그간 미국 내 생산 차량의 일부를 캐나다와 멕시코에 수출해왔는데 앞으로는 전량 현지 판매로 돌릴 예정이다. 미국 판매 물량이 현지 생산을 모두 충당하고도 연간 90만 대가량이 부족한데 관세에 노출되는 수입 물량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현대차·기아가 미국에서 생산해 캐나다로 수출·판매한 차량은 3만 626대에 달한다. 올 1~2월에도 미국 공장에서 생산된 6295대의 차량이 캐나다 수출길에 올랐다. 캐나다에는 완성차 공장을 두고 있지 않아 미국 등 인접한 국가에서 차량을 들여와 판매하는 구조다. 미국에서 멕시코로 수출된 물량도 지난해 3026대로 집계됐다.
캐나다와 멕시코 시장의 판매 수요는 국내 및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한 물량으로 대체한다는 구상이다. 현대차·기아는 미국 생산 확대에도 국내 생산량을 최대한 유지한다는 입장을 피력해왔는데 캐나다 수출 물량은 대부분 국내 공장이 커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대차·기아가 지난해 미국에 수출한 차량은 총 101만 3931대로 전체 생산량(340만 6075대)의 29.8%를 차지한다.
한편 현대차는 미국 신차 고객에게 제공해온 무상 수리 서비스를 올 연말 종료하는 등 비용 절감 조치를 병행하고 있다. 현대차를 시작으로 미국에 진출한 완성차 제조 업체의 무상 서비스 축소·중단 등 비용 감축은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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