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동안 더블보기를 4개 범하고 마스터스를 우승한 선수는 일찍이 없었다. 캐디빕에 81번(현장 등록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부여한다)을 달고 우승한 사례도 없었다. 더욱이 그 유명한 아멘 코너(11~13번 홀)에서 하루에 3타나 잃은 그였다.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이 부진할 때 ‘셰익스피어의 비극’ 얘기가 나오는 것처럼 로리 매킬로이(36·북아일랜드)도 지독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몰릴 상황이었다.
14일(한국 시간)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의 오거스타내셔널 골프클럽(파72)에서 열린 제89회 마스터스 최종일 경기. 18번 홀(파4) 그린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흐느끼는 매킬로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쓰라린 실패와 역경에 숱하게 꺾이면서도 기어이 미지의 영역에 발을 디딘 위대한 개척자였다.
스물두 살이던 2011년에 US 오픈 우승으로 메이저 정복의 첫발을 뗐던 매킬로이가 4대 메이저 대회를 석권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에 마침내 다다랐다. 2012년 미국프로골프(PGA) 챔피언십 우승에 2014년 디 오픈 우승(같은 해 PGA 챔피언십도 우승)으로 대기록에 마스터스 우승만을 남긴 뒤로 열한 번째 도전 만이다. 지난해 재결합한 아내, 아빠가 어떤 일을 해냈는지 아직은 모르는 어린 딸을 안고 매킬로이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1935년 진 사라센, 1953년 벤 호건, 1965년 게리 플레이어, 1966년 잭 니클라우스, 2000년 타이거 우즈 다음이다. 우즈 이후 25년, 사반세기 만이며 골프 역사에 여섯 번째인 대기록이다. 마스터스 우승으로 그랜드슬램을 완성한 것은 사라센과 매킬로이뿐이다.
이틀 연속 66타를 쳐 12언더파 2타 차 선두로 이날 4라운드를 맞은 매킬로이는 버디 6개를 잡았지만 보기 3개와 더블보기 2개로 1타를 잃었다. 6타를 줄이며 무섭게 치고 올라온 네 조 앞의 저스틴 로즈(잉글랜드)에게 11언더파 동타를 허용했고 18번 홀에서 치른 연장에서 두 번째 샷을 핀 90㎝에 붙인 뒤 끝내기 버디를 넣었다. 두 번째 샷을 먼저 한 로즈가 핀 3m에 잘 떨어뜨려 놓았지만 125야드를 날아간 매킬로이의 볼은 로즈의 볼과 핀 사이를 지나가 완벽한 버디 찬스를 선물했다. 메이저 5승 포함, PGA 투어 통산 29승째로 우승 상금은 420만 달러(약 60억 원)다.
매킬로이는 1번 홀(파4) 3온 3퍼트 더블보기로 같은 조 브라이슨 디섐보(미국)에게 곧바로 공동 선두를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이후 10번 홀(파4)까지 버디 4개를 챙겨 4타 차 선두를 달렸으나 아멘 코너인 11번(파4)과 13번 홀(파5)에서 보기-더블보기로 로즈에게 공동 선두를 허용했다. 14번 홀(파4)도 보기로 루드비그 오베리(스웨덴)까지 3명이 공동 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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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킬로이는 그러나 15번 홀(파5) 버디로 일어섰고 17번 홀(파4)에서 결정적인 버디를 작렬, 먼저 경기를 마친 로즈에 1타를 앞섰다. 18번 홀에서 벙커샷을 핀 1.5m쯤에 잘 붙이고도 못 넣어 연장에 끌려갔지만 두 번 실수는 하지 않았다.
매킬로이는 7번 홀(파4)에서 키 큰 나무들 사이를 넘기는 묘기로 파를 지키는 등 길이 남을 샷을 여러 번 보여줬다. 반면 쉬운 13번 홀에서 웨지샷을 짧게 쳐 물에 빠뜨리는 등 바보 같은 장면도 더러 남겼다. 영웅적인 샷과 대조되는 지극히 인간적인 실수도 있었지만 매킬로이는 기어이 그린재킷을 입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프레스빌딩 1층의 기자회견장을 찾은 매킬로이는 “마스터스에 2009년 처음 나와 열일곱 번째 도전이었고 그랜드슬램은 10년 전 첫 도전이었는데 여기 이렇게 이 옷을 입고 앉아 있다”며 그린재킷 왼쪽의 마스터스 로고를 힐끗 봤다. 그는 “1997년 우즈의 마스터스 첫 우승을 보고 이 대회를 목표 삼았던 기억이 난다”면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코스여서 긴장했고 첫 홀에 더블보기가 나왔다. 2년 전 욘 람(스페인)이 1라운드 첫 홀 더블보기를 하고도 우승한 사실을 떠올리며 진정했다. 그런데 더블보기를 네 번(1·4라운드 각 두 번)한 마스터스 챔피언은 내가 처음 아닌가”라며 웃었다.
지난해 US 오픈 마지막 홀에서 1m 파 퍼트에 실패, 디섐보에게 우승을 내주고 쓰라린 준우승을 했던 매킬로이는 10개월 만에 다시 만난 디섐보에게 완벽하게 설욕했다. 디섐보는 3타를 잃어 7언더파 공동 5위로 미끄러졌다. LIV골프 소속 선수의 마스터스 첫 우승도 물거품이 된 것이다. 로즈는 2017년 세르히오 가르시아(스페인)에게 연장 끝에 진 데 이어 또다시 연장 패배로 메이저 2승째를 미뤘다.
대회 2연패를 노렸던 스코티 셰플러(미국)는 8언더파 4위이고 임성재가 3타를 줄여 7언더파 공동 5위에 올랐다. 오베리는 6언더파 7위로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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