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당초 10조 원이었던 추가경정예산안 규모를 12조 원으로 늘려 잡은 것은 내수 부진이 예상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진단 때문이다. 미국 정부의 관세 정책 혼란으로 소비심리가 극도로 위축돼 올해 1% 초반대 성장에 그칠 수 있다는 게 정부 내부의 분위기다. 여기에 인공지능(AI) 등 기술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의 마중물 역할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추경안의 윤곽이 나온 만큼 국회가 신속히 처리해 집행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번 추경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책은 1인당 연간 50만 원씩 지급하는 ‘소상공인 부담경감 크레딧’이다. 이 크레딧을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과 보험료 납부 등에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게 정부의 계획이다. 그동안 비판을 받아왔던 포퓰리즘성 현금 지급 논란을 피하면서도 소상공인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은 전 국민에게 25만 원의 소비쿠폰(지역화폐)을 지급하자고 주장했으며 국민의힘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100만 원 규모 바우처를 지원하자고 요구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 재정 여건이 빠듯해 재정 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지원 대책을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연매출 1억 400만 원 미만의 소상공인 약 760만 명을 대상으로 크레딧을 지급한다고 가정하면 소요 예산은 총 3조 8000억 원(760만 명×50만 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날 구체적인 자격 조건 등을 공개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소비심리를 녹이기 위한 대책도 마련됐다. 전년 대비 카드 소비가 늘어난 소비자에게 소비 증가분의 일부를 전통시장 등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온누리상품권으로 환급하는 ‘상생페이백 사업’이다. 상생페이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전체 카드 사용 내역이 아니라 약 306만 곳의 연매출 30억 원 이하 영세·중소 카드가맹점에서 긁는 금액만 실적으로 인정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 같은 긴급대책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현재 소비심리는 최악 수준이다. 지난해 전국에서 일반음식점과 휴게음식점을 통틀어 총 10만 7526곳의 음식점이 폐업했다. 행정안전부가 지방행정인허가 관련 자료를 수집해 공개한 이래 사상 최대 규모다. 지난해 폐업률은 일반음식점(10.4%)과 휴게음식점(17.3%) 모두 신용카드 대란 때인 2005년(일반음식점 11.2%, 휴게음식점 17.3%) 이후 약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문을 여는 곳보다 닫는 곳이 더 많았던 탓에 지난해 일반음식점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감소했다. 소비가 살아나지 못하면서 전년 동월 대비 숙박 및 음식점업 생산지수(불변 기준)는 2월 3.8%나 감소했다.
당초 1조 원 규모였던 AI 분야에 대한 투자 규모를 1조 8000억 원 이상으로 늘린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AI 3대 강국 진입을 위한 지원을 더욱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며 “추경을 통해 1조 800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올해 본예산인 1조 8000억 원과 동일한 규모다. 최근 주요 대선 후보들은 수백조 원 단위의 AI 투자 공약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확충된 투자 재원은 연내 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 1만 장 확보와 팹리스(설계전문) 기업들이 공동 활용할 수 있는 고성능 AI 반도체 실증장비 2대 추가 도입 등에 쓰일 예정이다.
미국발(發) 관세피해·수출위기 기업에 대한 저리 대출 등 정책자금 25조 원도 신규 공급된다. 관세대응 수출바우처 지원기업도 2배 이상 늘린다. 올해 본예산에는 5641곳의 중소·중견기업이 지원받을 수 있는 914억 원이 배정돼 있는데 추경을 통해 관련 예산이 바닥나지 않도록 추가 편성하겠다는 것이다. 신속한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한 재해대책비를 기존 5000억 원에서 2배 이상 보강하고 중대형급 산림헬기 6대, AI 감시카메라 30대, 드론 45대 등 첨단장비 도입비용도 추경안에 반영한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해서라도 추경 편성과 집행은 불가피하다”면서도 “무작정 돈을 뿌리기보다는 AI 등 미래에 대한 투자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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