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066570)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지의 TV·가전 공장 증설 계획을 전면 중단하고 멕시코와 미국 등 북미 지역의 생산량을 늘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부과를 예고한 멕시코 공장의 감산 계획을 세우다 불과 3개월여 만에 방향을 180도 바꾼 것이다. 미국의 오락가락 관세정책 속에 대응책을 모색하던 기업들이 결국 미국 등 북미 지역을 향하면서 트럼프발(發) 공급망 재편이 가시화하는 모습이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LG전자는 최근 베트남과 인도네시아·폴란드의 TV·가전 생산량 확대 계획을 보류했다. 앞서 LG전자는 지난해 말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멕시코에 고율의 관세가 부과될 것에 대비해 멕시코 생산량을 다른 지역으로 돌리는 방안을 면밀히 검토했다. LG전자는 세계 각국에 공장을 짓고 물류비 등 지역별 상황을 고려해 탄력적으로 물량을 조절하는 ‘스윙 생산’ 체제를 가동 중이다.
멕시코는 인건비가 저렴하고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에 따라 미국으로 수출하는 제품에 관세가 면제돼 북미 수출을 위한 국내 기업의 전진기지로 통했다. 삼성전자(005930)와 현대자동차도 멕시코에 공장을 지었고 LG전자는 몬테레이와 레이노사 공장에서 TV와 냉장고를 만들어 미국에 보냈다. 이 때문에 트럼프의 멕시코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자 국내 기업들은 대책 마련에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삼성전자는 광주 생산라인 일부를 멕시코로 이전하려던 계획을 잠정 중단했다. LG전자는 국가별 물량을 조절하는 ‘스윙 생산’에 따라 베트남 하이퐁 공장의 냉장고·세탁기 생산을 늘리고 인도네시아와 폴란드에서는 TV를 더 만들기 위해 부품 수급과 인력 확대, 창고 확보, 물류망 점검 등 사실상 바로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사전 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멕시코에 부과한다는 관세는 기약 없이 미뤄졌고 오히려 플레이북에 남겨둔 동남아 지역이 표적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이달 2일 베트남에 멕시코보다 21%포인트 높은 46%의 관세를 부과했고 인도네시아 32%, 한국 25%, 유럽연합(EU) 20% 등 관세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는 점을 세계에 알렸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관세가 더 싼 지역에서 생산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해진 셈”이라며 “관세 부과는 미국 내 생산 확대가 목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9일 중국을 제외한 상호관세를 90일간 유예했지만 발효는 시간문제라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고심에 빠진 LG전자는 결국 동남아 물량을 늘리지 않기로 했다. 관세 이점이 없는데 미국까지 보내는 물류비와 생산 조정에 따른 추가 투입 비용을 고려할 때 수익성이 크게 악화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대신 멕시코 생산을 오히려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 우려가 컸던 멕시코는 미국의 상호관세 대상국에서 제외돼 10%의 보편관세마저 적용받지 않아 미국 수출에 가장 유리한 곳이라는 위상을 유지했다. 멕시코도 언제든 관세가 되살아날 수 있지만 현지에 공장을 둔 미국 자동차 회사들의 공격적인 로비가 진행되는 데다 미국 소비자가 물가 상승에 직접 노출된다는 인식에 관세의 영향이 높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실제로 큰 편이다.
LG전자가 향후 미국 내 현지 생산을 확대할 것이라는 전망에도 무게가 실린다. 그 신호탄이 테네시주 세탁기 공장 옆 창고 건설이라는 게 업계의 해석이다. 현지 매체와 클라크스빌·몽고메리카운티 산업개발위원회(IDB)에 따르면 ‘LG전자 테네시 제2단계 사업’ 프로젝트가 22일 IDB 안건으로 상정된다. 기존 세탁기·건조기 공장 옆에 약 5만 ㎡ 규모의 창고를 새로 짓는 사업이다. 창고를 세우는 데 드는 비용은 1억 달러 수준으로 알려졌다. 현지 언론은 새 창고가 기존 공장과 거의 비슷한 크기이며 6월 건설을 시작해 내년 3분기 중 완공될 것이라고 전했다.
LG전자는 최근 자체 투자심의회를 열고 이번 계획을 승인했다. LG전자는 “세탁기 등 제품을 보관하는 창고”라고 했지만 사실상 증설을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지 관계자는 “인건비와 자재 가격 상승으로 미국 내 건설 비용이 많이 오른 시점에 창고를 짓는 만큼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고 전했다. 앞서 조 사장은 지난달 주주총회에서 “테네시 공장에 냉장고·오븐 등을 생산할 수 있도록 부지 정비 작업이나 가건물을 올리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멕시코에 관세가 부과되면 지체 없이 (증설)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말했다.
LG전자가 높은 인건비에 증설 비용까지 감수하며 미국 생산을 고민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LG전자의 미주 매출은 22조 8959억 원으로 전체 매출(87조 7282억 원)의 26%를 차지했으며 이는 한국을 제외하면 가장 많다. 업계 관계자는 “다른 가전 회사들도 관세의 영향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LG전자가 미국 공장을 포함한 글로벌 생산량을 조절하며 최적의 원가 조합을 찾는다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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