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 근간인 자동차·철강 산업을 이끌어온 현대자동차그룹과 포스코그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고율 관세 파고를 넘기 위해 철강과 배터리 사업에서 동맹 관계를 구축한다. 현대차(005380)그룹이 계열사인 현대제철을 통해 미국에 짓기로 한 8조 원 규모의 제철소에 포스코가 공동 투자하는 한편 2차전지 소재 확보와 저탄소 철강 제품 개발에 양측이 힘을 모으기로 했다.
현대차와 포스코그룹은 지난 21일 서울 현대차 사옥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철강 및 2차전지 소재 분야 상호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포스코는 총 58억 달러(약 8조 5000억 원)를 투입하는 현대차그룹의 미국 루이지애나주 제철소 건설에 지분 투자로 참여한다. 투자 규모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수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제철의 루이지애나 제철소는 자동차 강판에 특화해 2029년 상업생산을 목표로 하는데 연간 270만 톤의 열연·냉연 강판 생산 능력을 갖출 계획이다.
국내 자동차·철강 업계 1위 기업인 현대차와 포스코가 ‘원팀’을 이룬 것은 트럼프 정부의 25% 관세 부과에 따른 위기를 극복하는 동시에 북미 시장에서 새 사업 기회를 모색하기 위한 차원이다. 미 시장의 판매 호조에 글로벌 완성차 3위로 올라선 현대차는 현지에서 차량용 강판을 조달해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고 성장세를 이어간다는 전략이다. 포스코는 공동 투자한 미 제철소를 통해 10여 년간 보호무역 장벽으로 제한된 북미 철강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다.
새로 짓는 제철소는 미국 최초의 전기로 일관제철소로 자동차 강판을 주력으로 한다. 쇳물부터 자동차 강판 등 제품까지 한곳에서 만들어 에너지 비용 및 물류비를 아낄 수 있다. 철광석으로 쇳물을 뽑는 고로(용광로) 대비 탄소 배출량을 줄이면서 고품질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국내 철강 업계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온 두 그룹의 동맹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이례적이다. 전방산업 침체와 중국발 공급과잉, 통상 압력 등 복합 위기 앞에서 ‘적과의 동침’을 선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포스코는 지분 투자의 대가로 철강 생산 물량의 일부를 넘겨받는 방안도 협의하고 있다. 미국 생산 거점을 확보해 관세 폭탄을 피하고 현지에 강판을 판매해 수익을 얻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게 된다. 포스코는 북미에 멕시코 자동차 강판 공장과 철강 가공센터(미국·멕시코)를 운영하며 다양한 완성차 업체를 고객으로 보유하고 있다. 미국에는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 현지 브랜드뿐 아니라 도요타·혼다·폭스바겐 등이 진출해 있어 추가 고객사 확보에 유리하다.
현대차는 포스코의 지분 투자로 막대한 투자 부담을 줄이며 리스크를 완화할 수 있다. 현대차는 투자금의 50%인 4조 2500억 원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외부에서 차입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면서 미국 내 100만 대 이상의 생산 체제를 갖춘 공장들에 필요한 고품질 강판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게 된다.
양 사는 전기차 배터리 소재에서도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포스코는 아르헨티나의 리튬 염호와 호주 광산 등을 통해 리튬·니켈 등 2차전지 소재로 쓰이는 광물자원을 개발하고 2차전지 소재용 수산화리튬과 니켈을 직접 생산한다. 포스코의 2차전지 소재 계열사 포스코퓨처엠은 국내 유일의 양음극재 생산 기업으로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배터리 3사를 고객사로 두고 있다.
현대차는 포스코의 2차전지 밸류체인을 활용해 안정적인 소재 공급망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미국이 중국산 원료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어 포스코의 공급망은 리스크를 완화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차는 경기 의왕 연구소에 차세대 배터리 연구동을 열고 전고체 배터리 시험 생산을 위한 파일럿 라인을 구축한 상황이다. 양 사가 차세대 소재 개발 등에서도 협력을 강화한다고 밝힌 만큼 의왕 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연구개발(R&D) 협력이 점쳐진다.
포스코그룹은 2차전지 소재 연구는 물론 제품을 납품할 판매처도 확보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돌파를 위한 든든한 우군을 얻었다. 포스코 관계자는 “현재는 큰 틀에서 전략적 협력의 기조만 세운 상황”이라며 “협력 방안은 앞으로 폭넓게 논의해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