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투자자들이 달러 자산을 팔아 치우면서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전 세계 기축통화로 자리 잡은 달러의 지위가 80년 만에 흔들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유무역,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글로벌 규범을 무너뜨리면서 ‘아멕시트(AMEXIT)’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미국이 스스로 만든 세계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최근의 움직임을 ‘브렉시트’에 빗댄 것이다.
21일(현지 시간) 미국 자산 시장에서는 주식과 국채·달러가 동시 투매되는 ‘셀 아메리카(Sell America)’ 징후가 거세지는 양상을 보였다. 이날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인덱스는 전 거래일 99.38에서 98.28로 떨어져 99선이 무너졌다. 장중에는 97.92까지 내려갔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긴축에 돌입하기 직전인 2022년 3월 이후 최저치다.
월가는 주식·국채와 함께 동반 약세를 보인다는 점에서 단순한 환율 변동이 아닌 미국 정책의 불신에 따른 달러 자산 이탈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이날 뉴욕 증시에서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가 2.48% 떨어지는 등 3대 지수 모두 2%대 하락률을 나타냈다. 미국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8.4bp(bp=0.01%포인트) 급등하며 매도세가 가팔라졌다. 시장 불안이 커지면서 안전자산인 금값은 치솟았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6월물 금 선물 가격은 22일 장중 트로이온스당 3504.2달러까지 올라 사상 처음으로 3500달러 선을 넘어섰다.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폭격에 이어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해임까지 거론하면서 미국 정책에 대한 불신은 깊어지는 형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의장을 겨냥해 “미스터 투 레이트(Mr. Too Late·의사 결정이 매번 늦는다는 뜻)이자 중대 실패자가 금리를 내리지 않으면 경기 둔화가 있을 수 있다”고 압박했다.
미국 경제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달러 자산 매도세 역시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글로벌 펀드매니저 대상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의 61%가 앞으로 12개월 동안 달러 가치가 하락할 것으로 봤다. 지난 20년 동안 가장 비관적인 전망이다. 도이체방크의 글로벌외환리서치 책임자인 조지 사라벨로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정책에서 물러났음에도 달러는 이미 타격을 입었다”며 “시장은 세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매력을 재평가하고 있고 급속한 탈(脫)달러가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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