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 반도체 사업부가 메타의 최신 생성형 인공지능(AI) ‘라마4’를 전 조직에 걸쳐 도입했다. 기존에는 공정 관련 데이터가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자체적으로 개발한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주로 사용했지만 전반적인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외부 LLM 모델도 활용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 SK하이닉스(000660)와 마이크론, 대만 TSMC 등 약진하고 있는 경쟁사들의 공정 개발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빗장을 푼 것으로 해석된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반도체를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은 이달 중 메타의 라마4를 직원들이 활용하는 어시스턴트 프로그램에 추가했다.
메타가 지난달 말 출시한 라마4는 텍스트와 이미지·음성·동영상 등을 동시에 이해하는 ‘멀티모달 AI’다. 삼성전자는 기본 모델인 매버릭과 경량 모델인 스카우트를 모두 도입했다. 임직원들은 단순 서류 업무부터 반도체 설계와 제조에 이르는 전 업무 과정에서 라마4를 사용할 수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라마4를 온프레미스(사내 구축형) 형태로 도입해 중요한 데이터에 대한 유출 위험도 없앴다. 외부 클라우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외부와 네트워크상 이어지지 않아 해킹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
그간 삼성전자 DS 부문은 2023년 말 개발한 자체 생성형 AI ‘DS어시스턴트’를 주로 업무에 활용해왔다. 그러나 절대적인 데이터 수가 부족하고 개발 인력이 많지 않아 성능 고도화가 느리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외부 생성형 AI를 이용해 반도체 설계·제조 경쟁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해석된다.
삼성전자는 라마4 외에도 다양한 빅테크 업체들의 생성형 AI를 반도체 사업에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임직원의 편의성 향상을 위해 고성능 오픈소스 AI 모델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LLM 빗장' 왜 열었나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은 그간 외부 생성형 인공지능(AI) 활용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2023년 3월 사내에서 챗GPT 접속을 허용한 지 한 달 만에 데이터 유출 우려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당시 일부 임직원이 반도체 관련 프로그램을 챗GPT에 입력해 오류 해결이나 최적화를 요청한 사례들이 모니터링 과정에서 적발됐다. 그러나 고대역폭메모리(HBM) 주도권을 뺏기며 올 1분기 SK하이닉스에 D램 매출 1위 자리를 내주고 미국 마이크론마저 치고 올라오자 경쟁력을 높일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외부 생성형 AI 도입을 결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설계와 제조 과정에서 축적되는 데이터는 차세대 제품 개발의 핵심이 되는 중요 자산이다. 이 때문에 그간 삼성전자는 챗GPT의 질문당 입력 글자 수를 제한하고 단순 업무 외에는 활용할 수 없게 하는 등 보안 지침을 강화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자체 생성형 AI인 ‘DS 어시스턴트’를 도입해 데이터 유출 우려를 원천 차단했다.
그러나 DS 어시스턴트가 빅테크들의 생성형 AI와 비교해 성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지속해서 나오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앞서 지난해 10월 삼성 5개 계열사 노동조합을 아우르는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삼성의 위기 극복을 위해 챗GPT 사용 제한을 해제해야 한다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초기업노조는 “세계 일류가 되려는 회사는 당연히 최상의 툴을 사용하고 트렌드에 맞게 일해야 한다”며 “AI를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해제해달라”고 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메타의 라마4를 비롯해 외부 생성형 AI를 폭넓게 도입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자체 생성형 AI에 더해 외부 AI까지 선택지를 넓혀 직원들의 업무 편의성을 높인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는 라마4가 출시되기 이전인 지난달부터 도입 계획을 사내에 공지하고 사용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외부 AI 활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데이터 서버를 외부가 아닌 사업장 내에 구축하는 방식을 채택해 데이터 유출 우려도 덜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DS 어시스턴트의 경우 단순 업무는 무리 없이 수행하지만 반도체 공정 업그레이드나 품질 향상 등 난도가 높은 업무 수행에서는 성능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며 “생성형 AI를 전담으로 개발하는 빅테크와 비교하면 양질 데이터 확보와 교육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D램 1위 뺏기고 마이크론까지 추격…삼성, 메타 손잡고 초격차 회복 승부수
HBM과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에서 수율과 품질 개선이 시급해진 것도 외부 생성형 AI에 문을 연 이유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D램에서는 10㎚(나노미터·10억분의 1m) 6세대 D램, 파운드리 사업에서는 3나노 이하 초미세공정을 두고 SK하이닉스와 미국 마이크론, 대만 TSMC 등과 싸우고 있다. 경쟁 강도가 하루가 다르게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빅테크의 생성형 AI를 도입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설계·공정을 빠르게 고도화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회로 선폭이 가늘어지고 회로 간격이 좁아질수록 공정 개발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AI 활용은 소요 시간과 변수를 크게 줄여주는 ‘지름길’ 역할을 한다.
삼성전자는 AI를 활용한 업무 효율성 높이기에 주력해왔다. 지난해 엔비디아의 디지털 트윈 플랫폼인 옴니버스를 반도체 업계 최초로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디지털 트윈은 현실의 기계나 장비를 컴퓨터 속 가상세계에 똑같이 구현해 다양한 상황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기술이다. 지난해 말에는 DS부문 산하에서 데이터와 정보기술(IT) 전반을 담당하던 혁신센터와 AI 연구조직인 AI 리서치센터를 통합해 최고정보책임자(CIO) 조직인 AI 센터를 신설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임직원의 효율성 증대를 위해 상황에 따라 알맞은 AI 모델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차원”이라며 “향후에도 외부 생성형 AI 도입을 지속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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