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국내 과학기술계는 두 가지 큰 사건을 겪었다. 하나는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이 전례 없이 삭감된 것으로, 그간 한번도 경험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라 연구현장에 미치는 충격과 혼란이 사뭇 컸다. 다른 하나는 유명 학술지인 네이처 인덱스(Nature index)가 특집기사를 통해 한국이 높은 연구개발 투자에 비해 연구개발 성과가 놀라울 정도로 낮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성격과 방식으로 발생했지만 그 배경에는 모두 연구개발 성과가 저조하다는 문제 인식과 비판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공공연구개발 투자 대비 성과가 낮다는 비판은 이미 10년 전부터 제기되었다. 더욱이 GDP 대비 정부연구개발투자 비중이 세계 1~2위 수준임에도 연구개발 저생산성 구조는 개선되지 못하고 고착화되는 양상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는 ‘한국형 R&D 패러독스’라는 부정적인 별칭으로 불린다. 그동안 정책적 노력으로 일부 성과 개선이 있었지만 여전히 연구개발투자 증가율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질적인 성과 개선이 더디다. 네이처 인넥스는 문제해결을 위해 국제공동연구의 확대, 여성 연구인력의 확대, 산학협력 강화 등을 제언했지만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선 ‘별로 와닿지 않는다’라는 반응이다. 이유는 우리나라만이 지닌 독특한 구조적 관성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정부 주도로 경제발전을 추진해 왔고 과학기술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역할을 해 왔다. 정부의 높은 관심과 기대는 연구개발 투자 확대로 이어졌지만 그에 비례해 정부가 연구생태계에 미치는 지배적 영향력도 두드러지게 큰 특징이 있다. 그동안 대학과 공공연구기관 등 주요 연구주체들은 연구예산의 대부분을 정부 재원에 의존해 왔다. 그런데 정부는 공공연구기관을 연구개발의 특수성을 고려해 별도로 예외적 관리하기보다는 일반 공공기관과 유사하게 예산투입관리를 강화하는 방식을 적용해 왔다. 이로 인해 연구주체들은 실질적 성과창출보다 정부의 형식화된 요구와 규율에 맞추는 데에 집중하게 되었고, 연구현장은 점점 관료화라는 덫에 빠지게 되었다.
관료화된 연구환경에서 연구자들은 성과가 불확실한 도전과제보다는 예측가능한 안전한 연구를 선택하며, 실질적인 필요성보다는 형식적 요건을 충족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데 집중하게 된다. 경쟁이 곧 효율이라는 인식은 과잉 경쟁과 폐쇄적 문화를 낳아 개방과 협력생태계 형성을 어렵게 한다. 성과관리는 객관성이 강조되어 정량평가에 의존하게 되고 전문성에 기반한 정성 평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연구성과 창출의 핵심요소인 도전성, 유연성, 창의성을 잃게 해 혁신적인 성과창출과 질적인 제고를 방해한다.
그동안 연구생태계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과잉경쟁 환경을 완화하기 위해 경쟁 중심의 예산제도인 PBS(Project Based System) 개선을 추진해 왔고 과도한 평가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들도 일부 시행해 왔다. 또한 출연연구기관의 자율적 운영을 제약했던 공운법(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적용도 어렵게 해제되었다. 문제는 이런 조치들이 일부 파편화된 개선에 머물거나 또 다른 제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제도 개선의 구조적 한계 즉, 정부의 권한 축소나 관리 노선에서 예외를 요구하는 자율과 책임 운영방식은 수용되기 어려운 경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도래와 기술패권 경쟁 심화로 과학기술의 혁신적인 성과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핵심요소가 되었다. 이제 연구성과는 단순한 과학적 성과를 넘어 국가안보와 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전략적 자산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연구성과를 창출하는 주체들의 현장 생태계가 도전적이고 창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못한다면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더라도 혁신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
국가간 혁신경쟁의 치열함 속에서 경쟁력의 핵심은 적합한 전략개발 능력과 인재의 탁월성에 있다. 그래서 우수한 전문인력들이 집결해 있는 공공연구기관의 연구환경을 선진화하는 것은 극한의 혁신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다. 핵심기술의 전략 개발에 필요한 통찰력도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접근과 연구를 통해서 길러지고 확보된다.
우리나라는 외형적으로는 경제규모(GDP) 세계 12위, 수출규모 6위라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 규모(GDP 대비 정부연구개발비 비중)도 글로벌 선두권이다. 그런데 국가 혁신 소프트웨어인 운영시스템과 연구생태계의 질적 수준은 지난 20년간 선진화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한 투자 확대를 넘어 연구생태계의 선진화 혁신을 통해 한국형 R&D 패러독스 구조를 극복하고 과학기술혁신 강국으로 변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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