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공개(IPO)를 통해 조달한 대규모 자금으로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하겠다던 약속이 공수표가 되고 있다. 수천억 원을 조달하고도 실제 투자는 30억~200억 원에 그치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다수다. 시장 전문가들은 M&A 계획과 실행의 괴리가 반복되면 시장 신뢰가 무너지고 향후 자본 조달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6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근 1년 내 상장하며 1000억 원대 이상 M&A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더본코리아(475560), HD현대마린솔루션(443060), LG CNS 모두 단 한 건의 기업 인수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유일하게 투자 이력이 있는 HD현대마린솔루션조차 스타트업에 30억 원 지분 투자한 게 전부였다. 이들 기업은 모두 수천억 원의 공모 자금 중 최소 절반에서 최대 90%까지 M&A에 쓰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행은 없었다.
더본코리아는 지난해 10월 IPO 계획을 발표하며 조달 자금의 93.5%인 935억 원을 M&A에 투입하겠다고 증권신고서에 담았다. 11월 코스피에 상장해 약 1000억 원을 조달했으나 반년이 지나도록 인수 소식은 없다. 당초 더본코리아는 연도별로 올해 200억 원, 내년 300억 원, 2027년 435억 원을 기업 인수에 쓰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도소매 식품기업 지분 100% 인수에 800억 원, 푸드테크 관련 회사 지분 투자에 135억 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었다. 계획과 무관하게 이달 노랑통닭 인수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회사는 곧바로 부인했다. IB 업계 관계자는 “더본코리아가 인수에 관심을 갖고 안내를 받았지만 추가 논의는 없었다”고 전했다.
상장 1년이 다 되가는 HD현대마린솔루션도 M&A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지난해 5월 코스피 입성으로 3700억 원을 조달했고, 이 중 2000억 원을 M&A에 쓰겠다고 밝혔다. 이기동 HD현대마린솔루션 대표는 상장 전 “해외 거점 조선소에 지분 투자하는 등 IPO 자금으로 적극 M&A에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난해 7월 해운물류 스타트업 씨벤티지에 30억 원 규모 지분투자만 했을 뿐이다.
상장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LG CNS의 M&A 소식도 없다. 올 2월 코스피에 입성한 LG CNS는 6000억 원을 조달했고 이 중 3400억 원을 M&A에 쓰겠다고 밝혔다. 현신균 LG CNS 대표는 상장 직전인 1월 “당장 밝히긴 어렵지만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M&A 사안이 있다”며 “가까운 시일 안에 깜짝 뉴스가 나올 수 있다”고 기대감을 높였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뚜렷한 성과는 없는 실정이다. LG CNS는 IPO 투자설명서에서 올해 스마트엔지니어링 사업확장 투자 및 인수에 2000억 원, 내년 금융공공 DX 전문회사 인수에 900억 원, 2027년 AI 소프트웨어 전문 회사 인수에 500억 원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2022년 상장한 쏘카도 마찬가지다. 당시 쏘카는 1000억 원을 조달했는데 이 중 600억 원을 M&A에 쓰겠다고 했다. 세부적으로 2022년(200억 원), 2023년(200억 원), 2024년 이후(200억 원)을 쓰겠다는 계획을 내놨지만 현재까지 지분투자 사례조차 없다. 상장 25년차인 엔씨소프트(036570)도 ‘M&A 공수표’로 유명하다.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초부터 대형 M&A를 준비 중이라며 기대감을 조성했다. 실제로 엔씨소프트는 2조 원 규모의 M&A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업계에서는 “국내 혹은 해외 게임사 빅딜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현재까지 구체적인 M&A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서 주가 부양 목적으로 M&A를 전가의 보도처럼 쓰고 있단 지적이 나온다. 엔씨소프트 주가는 2021년 초 100만 원을 넘어 ‘황제주’에 등극한 후 현재는 13만 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불확실한 경영 환경 속에서 M&A 계획을 원안대로 진행하기 어려운 측면도 없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경영진의 M&A 약속 불이행이 투자자 신뢰를 크게 훼손한다고 지적한다. IB 업계 관계자는 “IPO 자금 사용계획은 투자 의사결정의 핵심 근거”라며 “상장하면 끝이라는 안일한 태도로는 투자자 이탈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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