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올 4월 자동차 정기검사 패키지(RWP)를 개정한다고 발표하면서 글로벌 완성차 업계가 바짝 긴장했다. EU는 노후차량 검사 주기를 단축하고 배출가스 검사 기준을 강화하는 등 환경 규제를 확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또 전기차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전기차 및 소프트웨어 등 전자 시스템 검사도 의무화하기로 결정했다.
유럽 등 선진국에서 친환경 자동차 검사 체계를 강화하면서 국내 K-차량 검사기술은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 확대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미래 첨단차량에 대한 글로벌 표준 검사체계가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만큼 국내 기술이 국제 표준을 선점할 기회가 생겨서다. 이에 따라 국내 차량검사 기술을 책임지는 한국교통안전공단(TS)은 독일 등 선진기술 보유국과 협력을 강화하고 국제 콘퍼런스에서 국내 검사기술 성과를 보고하는 등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다.
늘어나는 전기차 보급…열폭주 등 화재 파괴력도 확대
에너지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 등에 따르면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2019년 232만 1000대에서 △2020년(321만 4000대) △2021년(671만 7000대) △2022년(1054만대) △2023년(1398만 4000대) 등 지속해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우려에도 중국 시장의 성장으로 글로벌 판매량이 1763만 3000대에 달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전기차 보급이 늘면서 배터리 열폭주 현상 등 화재 위험성도 확산하고 있다. 소방청에 따르면 국내 전기차 화재는 △2020년 11건에서 △2023년 72건 △2024년 73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 발생한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 화재 이후 전기차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당시 스프링클러 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총 87대의 차량이 전소하고 793대가 그을림 등 화재 피해를 보는 등 대규모 재산 피해가 발생한 바 있다. 자동차 보험업계는 전기차 등 친환경차가 화재 발생 확률은 낮지만, 화재 발생 시 피해 등은 내연기관차보다 클 수 있다고 평가한다. 미국 보험업체 오토인슈어런스가 미국 교통안전위원회(NTSB)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전기차 10만대 당 화재 발생 건수는 25건으로 내연기관 차량(1592건)의 1.5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전기차의 배터리가 열폭주 현상을 보일 경우 내연기관 엔진 화재보다 온도가 최대 1000도 이상 올라가는 등 위험성은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기차 화재 위험성으로 인한 대규모 피해 등이 논란이 되면서 전기차 안전도 검사도 강화하는 추세다. TS는 이에 독자 개발 검사시스템인 카디스(KADIS)를 구축해 친환경 차량의 전자장치 상태를 면밀하게 검사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카디스는 기존의 전기차가 멈춘 상태에서 검사를 수행하는 방식에서 실주행을 모사한 상태에서 배터리의 안전과 성능을 검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미국 테슬라 차량이었다. 테슬라는 국내 전기차 기술과 다른 방식으로 제조된 만큼 국내 민간검사소 등에서 전자장치 상태 점검 등이 쉽지 않았다. TS는 이에 미국 테슬라 본사와 공동으로 2023년 1월 테슬라 차량에 대해서도 진단이 가능한 전용 케이블을 개발하기 시작해 최근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카디스를 활용하는 민간검사소도 대폭 늘었다. 2021년부터 카디스 보급을 추진해 2023년 전체 민간검사소 1872개소 중 29%가량인 542개소에 보급했다. 최근에는 카디스 활용 보급소가 전체의 절반을 넘는 1124개소까지 증가했다. TS는 이들 민간검사소 1100개소에 테슬라 점검이 가능한 전용 케이블을 무상으로 제공해 점검 역량을 강화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신(新)검사장비 3종 앞세워…미래 모빌리티 안전 주도
TS는 지난달부터 자체개발한 검사 장비 3종에 대한 실증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는 △전기차 안전성 확보를 위한 자동 절연저항 검사장비 △저소음자동차경고음 발생장치 검사장비 △배터리 검사장비로, 향후 현장 적용성 등을 높여 실제 검사에 투입될 예정이다. 자동 절연저항 검사장비의 경우 자동차 충전구의 절연저항 검사를 위한 장비이다. 기존 수동방식에서 자동방식으로 개선해 검사 효율과 정확성을 높일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TS는 연말까지 국내에 등록된 전기자동차의 충전포트 유형별 어댑터 개발을 완료할 계획이다. 저소음자동차경고음 발생장치 검사장비는 검사원 청각으로만 이루어지던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검사소 외부 환경 소음을 고려해 계측할 수 있도록 한 기술이다. 또 배터리 검사장비는 TS에서 자체 개발한 ‘카디스’를 통해 배터리의 안전과 성능 등을 검사할 수 있는 알고리즘 및 장비이다. TS는 이 밖에도 지난해부터 성산검사소를 시작으로 친환경차 검사진로 구축을 추진 중이며, 전기차 검사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지속적인 확대 계획을 내놓을 예정이다.
또 TS 첨단자동차검사연구센터(KAVIC)를 통해 △전기차 및 사용 후 배터리를 포함한 전기차 배터리 안전성 확보 △자율주행차 테스트벤치 개발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검사기술 개발 △인공지능(AI)과 데이터(DATA) 활용한 첨단검사 등 4대 분야를 중심으로 미래형 자동차 검사체계 구축을 추진 중이다.
독일 등에 기술 수출 채비…국제 협력 강화로 유리한 위치 선점 확보하나
TS는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독일 등 선진국에도 기술 수출을 준비하고 있다. 올 4월 열린 국제 기술포럼에서 TS는 독일 첨단자동차 검사연구소(FSD)와 글로벌 협력 방안을 논의하며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FSD는 2004년 독일 자동차검사 제도 관리와 기술 개발 목적에서 설립된 최고 권위를 지닌 기관이다. 필리프 슈리히트 FSD 최고경영책임자(CEO)는 이 자리에서 “독일에서 신규 등록차량 가운데 20%가 전기차에 달할 정도로 급증세를 보여 기존 검사체계의 한계를 체감한다”며 “TS가 보유한 검사기술, 고도화된 데이터 분석 체계 등을 독일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개발한 검사시스템의 독일 이전 가능성에 청신호가 켜진 셈이다. 유럽 자동차 검사 시스템을 주도하고 있는 독일에 기술 이전을 하게 되면 사실상 유럽 전역에 한국교통안전공단의 진단 시스템이 사용되는 것으로, 국제 표준을 선점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차량검사업계에서는 이와 관련 한국의 자동차검사 기술이 국제적 수준으로 인정받은 사례라고 평가한다. 국내의 한 자동차 엔지니어는 “자동차 검사에서는 독일, 일본 등이 앞서나가 있는데 한국의 기술력도 우수성을 평가받은 것”이라며 “전기차의 사용 후 배터리,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의 업데이트 확인 검사 등에서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국제회의에서도 이 같은 기술 강점을 대거 알리며 시장 표준 선점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올 5월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국제자동차검사위원회(CITA) 제24회 총회와 CITA 국제 콘퍼런스 등이 대표적이다. CITA 총회는 독일·일본·네덜란드 등 전 세계 53개국 400여 명이 참석해 국가 간 자동차 검사 개선 방향 등 정보를 공유하고, 미래 자동차 검사기술 개발 방향 등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이다. TS는 이 자리에서 아시아·오스트랄라시아 지역 의장으로 지역 내 자동차 검사 분야 연대 확대를 위한 활동 계획을 내놓았다. 또 CITA 국제 콘퍼런스에선 공적개발원조(ODA)의 하나인 ‘몽골 자동차 검사역량 제고 및 시설 개선을 통한 교통안전 강화 ODA 사업’의 추진 현황을 발표해 주목받았다.
TS는 이 같은 역량을 인정받아 CITA 상위 6개 회원에만 주어지는 최고 운영기구(BP) 위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국가 간 중고차 수출입 검사 정보 교환에 관해 논의가 이뤄지는 ‘중고차 수출입 전문가기술그룹(SCUNV IWG)’, 자율차 및 전기차 배터리 검사 국제 표준을 선도하는 CITA 워킹그룹(WG)에도 적극 관여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지속해서 높이고 있다.
정용식 TS 이사장은 “첨단차 운행 안전 확보를 위한 검사 역량은 국가 교통안전의 핵심 기반”이라며 “세계적인 자동차 안전성 평가 및 검사 기술을 보유한 TS의 역량을 바탕으로 국제 협력과 기술공유를 확대하고,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 모빌리티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