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지난해를 기점으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디지털 의료기기 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만성질환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는 등 활용 범위가 빠르게 확장되면서다. 미국과 유럽·일본 등 해외시장에서 ‘K의료기기’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13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디지털 의료기기의 생산액과 수출액은 각각 5472억 원, 3억 3400만 달러를 기록했다. 5년 전인 2020년 생산액(1552억 원)과 수출액(1억 2000만 달러) 대비 각각 252%·178% 증가한 수치다. 전체 의료기기 생산액이 같은 기간 12% 성장하고 수출액은 되레 8% 역성장한 것과 비교해 고무적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최근 AI 기술을 활용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늘면서 다양한 기능의 디지털 의료기기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의료기기는 초고령화 사회에서 의료비 절감 등 사회적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산업 성장을 견인할 수 있는 핵심 분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는 병원이 아닌 가정에서 환자 스스로 질병을 예측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술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의료의 중심축도 점차 ‘치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의사 중심’에서 ‘환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추세다. 특히 한국은 5세대(G) 통신 등 고도화된 인프라를 바탕으로 디지털 의료기기의 실사용 환경을 구축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다.
일례로 카카오헬스케어는 연속혈당측정기(CGM)와 연동되는 모바일 건강관리 솔루션 ‘파스타’를 개발해 당뇨 환자의 식단·운동·수면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의료기관과 공유함으로써 만성질환 관리를 돕고 있다. 씨어스테크놀로지의 병상 모니터링 솔루션 ‘씽크’는 병원 내 환자의 생체 신호를 분석해 심정지·낙상·패혈증 등의 위험을 조기에 감지하고 의료진에게 알려 병원의 환자 관리 부담을 줄인다. 루닛(328130)은 AI 영상 진단 소프트웨어 ‘루닛 인사이트’를 활용해 폐암·유방암 등 주요 암을 보다 조기에 진단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해외 진출도 활발하다. 카카오헬스케어는 9월 일본에 파스타 서비스를 출시할 계획이며 씨어스테크놀로지도 부정맥 진단 서비스 ‘모비케어'의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인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루닛 또한 1억 건 이상의 의료 데이터를 보유한 미국 기업 볼파라를 인수하고 해외 의료기관 및 공공 부문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같은 성장세에 정부도 제도적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올 1월 세계 최초로 시행된 ‘디지털의료 제품법’이 대표적이다. 데이터 학습이 잦은 AI 디지털 의료기기의 특성을 반영한 법으로 제품 허가를 받을 때 사소한 변경은 보고만 하면 되도록 하는 한편 AI 학습 데이터 정보는 공개해 투명성을 강화했다.
다만 디지털 의료기기가 성장에 날개를 달려면 규제 개선은 여전히 필요하다. 첨단 기술을 활용한 의료기기는 허가부터 건강보험 급여 대상 확인, 신의료 기술 평가 등 최대 490일이 소요되고 있다. 정부가 이를 최대 140일로 줄이는 ‘시장 즉시 진입 가능 의료 기술 제도’ 시행을 예고한 가운데 업계는 식약처 인허가를 이미 받은 뒤에도 신의료 기술 평가를 다시 받는 ‘이중 규제’를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업계 관계자는 “빠르게 성장하는 의료기기 시장에서 한국의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할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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