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외환보유액을 운용하기 위해 국내외 민간 자산운용사에 맡겼던 금액 중 일부를 회수해 직접 굴리기로 했다. 비용을 절감하고 자산별 배분 전략을 강화하는 동시에 시장 정보를 이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조치다. 외환보유액 중 채권·주식 등 유가증권에 해당하는 3585억 달러(약 498조 원·6월 말 기준)중에서 한은이 운용한 것 중 주식에 배분한 10%의 자산이 우선 대상이다.
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2007년부터 투자하기 시작한 주식에 대해 100% 위탁 운용에서 일부 직접 운용으로 수정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한은은 주식 자산 중 절반가량은 한국투자공사(KIC)에 위탁하고 나머지는 주로 블랙록 등의 글로벌 자산운용사에 맡겨왔다. 최근에는 국내 금융산업 발전을 위해 국내 자산운용사에도 문호를 열었다.
한은이 자산을 직접 운용하기 위해 KIC를 제외한 국내외 민간 자산운용사 몫 중 일부를 회수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한은은 위탁 운용이 성과에 비해 수수료 등 비용이 높고 증시 전체의 흐름을 따르는 패시브 전략의 비중이 커지는 최근 추세와도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통상 위탁 운용은 액티브 전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쓰는데 펀드 매니저가 개별 종목과 시점을 선정해 투자하는 액티브 전략은 전 세계적으로 힘을 잃고 있다.
특히 전체 수익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자산군별 배분 전략을 강화하려는 의도도 내포됐다. 주식과 채권에만 투자하는 한은은 두 자산의 비중 변화가 중요한데 주식을 맡긴 상황에서는 빠른 변경이 어렵기 때문이다. 직접 운용을 통해 변동성이 커지는 미국 등 해외 주식시장에 대한 실시간 파악을 확대하는 것도 목표다.
업계 관계자는 “한은은 자산 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 해외시장 정보를 직접 취득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략 변경을 논의해왔다”고 설명했다.
‘어차피 오를 미 증시인데’…비싼 수수료 대신 직접 운용 시동건 한은
약 569조 원 (4102억 달러·6월 기준)의 외환보유액의 일부를 운용하는 한국은행 외자운용원은 가장 보수적인 기관투자가다. 국가 경제의 보루인 외환보유액을 언제든 현금화 할 수 있도록 한 현금성 자산을 빼고도 약 500조 원 대부분을 유동성이 높은 채권과 주식에 투자한다. 지난해 이들 외화 유가증권에 투자해 10조 9845억 원의 수익을 거뒀다.
특히 2007년부터 투자하기 시작한 주식은 지금까지 미국 등 선진국 시장을 중심으로 블랙록·슈로더 등 글로벌 자산운용사와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에 전부 맡겨왔다. 2012년부터는 미래에셋·삼성·KB 등 국내 자산운용사에도 주식 자산의 일부를 위탁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이들 중 일부는 한은의 거래 상대방에서 제외될 수 있다. 반면 한은이 직접 주식을 거래하려면 통로 역할을 해줄 증권사들이 새롭게 한은의 문을 두드릴 것으로 보인다.
한은은 관세 전쟁으로 변동성이 커진 증시에서 직접 운용을 통해 시장 정보를 현장에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통해 자산군별 운용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목표를 세웠다.
전문가들은 한은이 선진국 증시 위주로 투자하는데 굳이 위탁 운용이 필요한지 의문을 갖고 있다. 선진국은 신흥국에 비해 시장에 공개된 정보가 많고 다수의 거래가 이뤄지기 때문에 특정한 운용사나 펀드매니저가 우위를 갖기 어렵다. 위탁 운용은 주로 액티브 전략을 취하는데 정보력과 전문성으로 투자 종목과 매매 타이밍을 결정해 전체 시장의 성과보다 초과 수익을 확보하는 게 목적이다. 한 기금운용 전문가는 “특정 종목을 선택하는 액티브 전략의 효과는 떨어지고 있으며 수익률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의 90%는 자산군별 비중”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시장을 이기기 어려운 선진국 증시에 비싼 수수료를 내며 돈을 맡길 이유가 없다는 게 한은의 판단이다. 한은의 주 투자처인 미국 증시는 어차피 시장 전체의 상승 가능성이 높은데 이보다 더 높은 수익을 내기는 쉽지 않다.
블랙록 등 민간 운용사 중 일부 투자금 회수…개별 판단 맡긴 액티브 투자 수익률 저조
대신 한은은 직접 주식 운용에 뛰어들어 장기적으로 미국 등 선진국 증시가 성장하는 흐름을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운용 자산만 1156조 원인 AB자산운용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닷컴버블이나 글로벌 금융위기로 S&P500지수가 20%까지 떨어져도 연간으로는 플러스 수익을 냈다. 국민연금·KIC 등 다른 공적 연기금도 같은 이유로 위탁보다 직접 운용을 늘리는 추세다.
국민연금연구원의 ‘해외주식 위탁 포트폴리오의 운용 유형에 관한 연구’를 보면 1999년 1월부터 2020년 9월까지 미국 공모펀드의 월간 수익률을 비교한 결과 패시브 전략에 해당하는 상장지수펀드(ETF)에 비해 액티브 펀드의 성과가 더 높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형 연기금 역시 위탁 운용을 줄이고 있다. 액티브 전략을 주로 사용하는 캐나다연금(CPPIB)·노르웨이국부펀드(GPFG)조차 직접 운용 비중이 더 높았다.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은 액티브 전략이 실패하자 아예 자산의 90%를 직접 운용하고 있다.
주식·채권 자산배분 비중 전략 강화…외환보유고 운용 효율 극대화
한은이 해외 주식을 직접 운용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외환보유액의 관리를 더욱 강화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외환보유액 중 유가증권 비중은 2021년 말 4216억 달러(약 585조 원)에서 2022년 3697억 달러(513조 원)로 내려간 뒤 올 6월 기준 3585억 달러(498조 원)로 500조 원을 밑돌고 있다. 해외 자산운용사는 대규모 자금을 리파이낸싱(자본재조정)하면서 잦은 수수료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투자 수익을 갉아먹는 원인이 된다. 한은은 수익률을 올리기 위해 2011년 5%대 불과했던 주식 비중을 2021년부터 10%까지 끌어올렸다.
연기금 투자 수익을 결정하는 요소는 사실 개별 종목보다는 자산을 주식과 채권 가운데 어디에 얼마씩 담는가 하는 비중이다. 한은은 주식 자산을 위탁 운용하는 탓에 시장 변화에 따라 주식 자산의 비중을 변경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나아가 싱가포르투자청(GIC)을 비롯해 국민연금과 KIC는 주식과 채권의 기존 구분을 허물고 투자 비중을 수시로 변경하는 통합 포트폴리오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한은은 주식 자산을 직접 운용하기 위해 한은 소속으로 외환보유액을 운용하는 외자운용원에 관련 조직을 확충했다. 그동안은 채권 자산에만 직접 운용 조직이 있었는데 올해 초 주식 직접 운용을 위한 부서를 신설했다. 또 한은이 운영하고 있는 뉴욕과 런던 데스크가 주식 운용 과정에서 역할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은이 주식 직접 운용 비중을 어디까지 늘릴지도 관심이다. 한은은 주식 자산의 일부를 운용해온 KIC에는 당분간 위탁 운용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이지만 이미 수년째 추가로 KIC에 위탁 자산을 늘리지는 않고 있다. KIC 관계자는 “KIC에 외화 자산을 맡겨온 한은과 기획재정부가 최근에는 위탁 자산을 늘리지 않기 때문에 KIC 스스로 운용 규모를 늘리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