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답답한 공기를 벗어나 경기도 양평 깊은 산골로 들어서면 이국적이면서도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숲과 계곡, 돌담과 연못이 이어지고 그 위에 고즈넉한 건축물이 걸터앉아 있다. 이달 1일 메꽃이 흐드러지는 ‘메덩골’ 골짜기에 문을 연 메덩골한국정원이다. 전체 면적 20만 ㎡(6만 평)에 달하는 ‘메덩골정원’의 일부로 전체 개장은 내년이지만 1차로 2만 3000㎡(7000평) 규모의 ‘한국정원’이 먼저 공개됐다.
이곳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다. 철학자 ‘니체’로부터 영감을 받아 전통과 현대, 자연과 예술, 철학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이곳에서 정원은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사유하는 무대다. 그래서인지 발걸음을 떼는 순간 풍경은 곧 사색으로 이어진다.
풍속화에서 철학으로
입구를 지나면 가장 먼저 ‘고향의 봄’을 닮은 숲길과 마주한다. 개복숭아와 살구가 주렁주렁 열린 길을 빠져나오면 작은 계류 ‘빨래터’가 등장한다.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영감을 받은 공간으로 넓적한 멍석 바위가 물 위에 놓여 있어 마치 누군가 갓 빨래를 마치고 떠난 듯하다. 삶의 고단함마저 풍경으로 승화시킨 모습은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 곧 ‘운명을 사랑하라’는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빨래터 옆 돌담길은 영화 ‘서편제’ 속 청산도 남도길을 모티브로 했다. 담 안쪽에는 벼·대파·들깨가 심겨 있어 정겨운 농촌 풍경을 재현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 복원이 아니다. 몇 번이고 담을 허물고 다시 쌓으며 농부의 손길 같은 자연스러움을 되살렸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을 예술로 끌어올린 셈이다.
용이 돌아오는 연못, 힘에의 의지
길이 열리듯 시야가 트이자 옥빛 연못 ‘용반연’이 나타난다. 물 위에는 정자가 걸터앉아 있고 그 아래로는 맑은 물줄기 속에서 버들치와 산천어가 떼 지어 반짝인다. 고요하지만 안쪽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물결은 마치 숨겨둔 힘을 드러내는 듯하다. 단순한 풍경을 넘어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가 자연의 형상으로 눈앞에 서 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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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풍류와 초인의 꿈
연못을 돌아서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소박한 한옥 ‘파청헌’ 앞마당에는 작은 연못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꾸밈없이 비워둔 공간에 푸른 하늘이 통째로 내려앉았다. 마당에는 덩그러니 놓인 큰 바위 하나가 전부다. 절제와 여백 속에 선비들의 풍류가 살아 숨 쉰다.
이어지는 길 끝에서는 웅장한 건축물이 시야를 압도한다.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선곡서원’이다. 콘크리트로 세운 프레임은 단단하면서도 투명하게 주변을 끌어안는다. 건물의 중심에 있는 취병루에 오르는 순간 사방으로 펼쳐진 산세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인간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스스로를 초월하려는 몸짓이 그대로 드러난다. ‘철학의 정원’이라는 이름이 실감 나는 대목이다. 니체가 꿈꾼 초인의 이상이 풍경과 건축, 그리고 그 공간을 걷는 발걸음 속에서 되살아난다.
한국 정원의 부활, 그리고 내년의 약속
메덩골정원은 산업화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단절됐던 한국 정원의 맥을 다시 잇는 프로젝트다. 13년 동안 전국을 돌며 돌과 나무를 실어 날랐고 그 결과 한국의 삶과 미학을 담은 공간을 일궈냈다. 그러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니체 철학을 본격적으로 담아낼 ‘현대정원’은 내년 개장을 앞두고 있다. 프랑스·스페인·영국의 조경가와 건축가가 참여한 위버하우스·디오니소스 등은 철학과 예술이 결합된 새로운 작품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입장료는 성인 5만 원으로 결코 가볍지 않다. 시간당 100명 이하만 입장할 수 있으며 단체 관광은 받지 않는다. 대신 하루 세 차례 도슨트 투어와 판소리 공연이 무료로 진행돼 정원의 철학과 이야기를 깊이 체감할 수 있다.
양평 깊은 산골에 자리한 메덩골정원은 이제 막 첫 장을 열었다. 이미 그 안에는 니체의 철학, 한국의 정원 미학, 그리고 설립자의 집념이 녹아 있다. 단순한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삶을 다시 묻는 사유의 무대, 메덩골에서 우리는 묻는다.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하는가, 나는 내 삶을 초월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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