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의 재무지표가 최근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수천억 원대 투자가 심층 논의도 없이 집행됐다는 평가 속,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신사업과 경영권 방어 비용이 겹치면서 수십 년간 유지해온 ‘무차입 경영’ 기조는 사실상 무너졌다. 차입금이 급증하고 이자 부담이 불어나면서 재무 안정성이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1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고려아연의 이자비용은 지난해 상반기 250억 원에서 올해 상반기 1100억 원으로 상승했다. 불과 1년 사이 현금이 4700억 원 줄고 차입금이 3조 7000억 원 넘게 늘어난 결과다. 고려아연의 올 6월 말 기준 순차입금은 3조 3000억 원에 달한다. 과거 무차입 기조를 자랑하던 회사가 불과 1년 만에 순차입 기업으로 바뀐 셈이다. 차입 확대가 단기간에 이뤄지면서 이자비용이 급격히 불어나 시장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핵심 사업인 제련 부문은 여전히 견조하다. 단일 제련소 기준 세계 최대 규모인 온산제련소를 기반으로 한 제련사업은 올해 상반기 별도 기준 매출이 전년 대비 27.6% 늘었고, 매출총이익률도 전년 수준을 지켜냈다. 글로벌 원자재 가격 변동과 경기 둔화라는 악재 속에서도 안정적인 생산 능력과 원가 관리 역량을 입증한 셈이다. 하지만 연결 기준으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회사 적자와 각종 비용이 본업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갉아먹으면서, 본업의 성과가 그룹 전체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트로이카 드라이브’ 일부 적자…차입 폭증
최윤범 회장이 성장동력으로 내세운 ‘트로이카 드라이브’ 신사업은 여전히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2차전지 소재 개발을 맡은 케이잼, 제련 부산물 재활용을 담당하는 켐코, 호주 합작사 선메탈홀딩스, 신재생에너지 법인 페달포인트 등은 모두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회사의 반복적 자금 지원에도 개선은 지연됐고, 지난 1년간 이들 자회사에서만 1000억 원이 넘는 순손실이 발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까지 단행됐다는 점이다. 영풍·MBK 연합이 이사회에 합류하기 전 집행된 원아시아파트너(5600억 원), 미국 이그니오홀딩(5800억 원) 투자를 비롯해, 올 상반기에는 심해채굴업체 TMC(약 1200억 원) 투자가 이사회의 의결 없이 경영진의 전결로 이뤄졌다. 고려아연은 “자기자본 대비 비중이 낮아 이사회 결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았다”는 입장이지만, 영풍·MBK파트너 측은 “매출이 없는 기업에 대한 투자라면 규모와 무관하게 충분한 사전 논의가 필요했다”고 반박했다. TMC는 상업 채굴 허가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태여서 투자 회수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신사업이 자금을 빨아들이는 동안 재무구조는 빠르게 흔들렸다. 순차입금이 단기간에 수조 원 불어나면서 이자 비용은 지난해 수백억 원 수준에서 올해 들어 네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고려아연은 매년 1조 원 안팎의 상각전영업이익(EBITDA)을 창출하는 회사지만, 본업에서 번 현금이 효과적으로 축적되지 못한 채 외부로 유출되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지난해 실시한 2조 5000억 원 규모의 자사주 공개매수도 영향을 미쳤다. 신용평가사들은 “경영권 분쟁과 무리한 자금 집행이 단기간 내 부채비율을 급등시켰다”고 지적했다.
경영권 방어 비용과 지배구조 리스크
경영권 방어를 위한 비용 지출도 재무구조 악화의 원인으로 꼽힌다. 고려아연은 2023년 6월부터 2024년 6월까지 지급수수료(법률·컨설팅 비용 등)로 1401억 원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후 1년간 지출은 3244억 원으로 2.3배 늘었다. 매출 대비 비중 역시 같은 기간 1.4%에서 2.3%로 확대됐다. 업계에서는 이 가운데 최소 1000억 원 이상이 현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분석했다.
이 같은 비용 증가는 수익성 지표에도 반영됐다. 연결 기준 영업이익률은 8.3%에서 6.9%로 낮아졌고, 환율·평가손익 등 일회성 요인을 제외한 당기순이익은 3500억 원에서 2700억 원으로 줄었다. 본업인 제련사업이 안정적 실적을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신사업 적자와 방어 비용 증가가 수익성을 깎아낸 것이다.
지배구조 불안도 문제로 지적된다. 낮은 지분율의 오너가 사실상 경영을 주도하는 구조에서, 이사회가 독립적 견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비슷한 방식의 투자와 비용 집행이 반복될 수 있다. 이른바 ‘경영대리인(에이전트 프라블럼)’ 이슈다. 다만 외부 주주 합류 이후 이사회 감시가 강화되면서 전결 중심의 투자 관행은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고려아연은 여전히 세계적 수준의 제련 경쟁력과 현금창출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분쟁과 지배구조 리스크를 해소하지 못하면 재무 안정성 회복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고려아연 “분쟁에 따른 공격이 계속되면서 기업가치가 훼손되는 부작용도 크다”며 “분쟁 당사자이자 주주가 회사 가치 하락을 주도하면서 다른 주주들의 비판의 목소리도 제기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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