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가 울리니 세찬 파도가 잦아든다. 가뭄에 비가 내리고 장마에 날이 갠다. 적군은 물러가고 아픈 사람은 병이 낫는다. 이 영특한 피리의 이름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다. 만 가지 파도를 잠잠하게 만드는 피리. 태평성대를 꿈꾼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설화다.
왜 피리였을까. 통일이라는 새 장막을 펼친 신라인에게는 고구려와 백제를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했다. 피리가 내는 아름다운 소리에는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화합의 공명을 불러일으키겠다는 통일신라의 염원이 담겨 있다.
화합을 의미하는 만파식적의 고장 경주에서 다음 달 말 제33회 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PEC’에는 한국을 포함해 21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1989년 출범한 APEC은 전 세계 인구의 약 40%, 교역량의 50%, 국내총생산(GDP)의 60%를 차지한다.
한국의 무역·투자에서도 APEC 비중은 절대적이다. APEC 회원국은 지난해 한국 수출의 76%, 수입의 68%를 차지했다. 10대 교역국 중 9곳이 APEC 회원이다. 지난해 국내 유입된 외국인 직접투자 중 APEC 회원국 비중은 64%에 달했다. 우리나라의 해외 직접투자 중 APEC 국가로 향한 비율도 61%에 이른다.
KOTRA는 APEC 국가들과 경제협력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10월 말 정상회의 전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24일 경주에서 ‘한국·APEC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개최해 APEC 경제협력의 서막을 올린다. 이번 행사는 무역 상담회와 인프라 프로젝트 상담회, 자원 구매 공급망 상담회로 구성했다. 사업 논의가 끝난 후에는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경주 일대 문화 유적지를 방문하는 ‘블레저(Bleisure)’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온 기업인들이 신라의 미소에 마음을 녹이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다음 달 16일에는 ‘2025 APEC 회원국 및 경북 투자포럼’이 경주에서 개최된다. APEC 회원국 간 상호 투자 협력의 계기를 마련해 APEC 정상회의의 사전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계획이다. 이들 경제 행사를 통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주의 브랜드 가치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최대 수출 상담회인 ‘붐업 코리아 위크’와 국가 기업설명회(IR) 행사인 ‘인베스트 코리아 서밋’도 APEC 정상회의와 연계해 열린다. 수출과 투자 유치에서 가시적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할 것이다.
정상회의 부대 행사인 ‘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도 주목할 만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준비 중인 이 행사에는 21개 APEC 회원국 정상과 글로벌 CEO 1700명이 함께한다. 각국 정상과 기업 대표들이 글로벌 경제의 미래를 놓고 열띤 논의를 벌일 것이다.
올해 APEC 정상회의 주제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 가능한 내일’로 중점 과제는 연결·혁신·번영이다. 전 세계 85개국 131개 도시의 무역관을 통해 전 세계 기업인들을 연결하고, 무역·투자 서비스를 통해 비즈니스 혁신을 도모하는 한편 궁극적으로 APEC의 공동 번영에 기여할 것이다.
급변하는 글로벌 통상 환경이라는 파도를 넘기 위해 세계 각국이 만파식적의 고장에 모여든다.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를 상상했던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한·APEC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시작으로 다양한 경제협력 행사를 통해 APEC 성공 개최에 힘 쏟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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