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인수합병이라는 꼬리표가 붙던 SK하이닉스(000660)의 미국 낸드플래시메모리 자회사 솔리다임이 인공지능(AI) 산업의 물결을 타고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SK그룹에 편입된 뒤 7조 원이 넘는 누적 적자를 기록하며 고난을 겪었지만 AI데이터센터용 제품 수요가 급증하며 사상 최대 실적 달성을 눈앞에 뒀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솔리다임은 올해 인수 후 최대인 9조 3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순이익 추정치는 6130억 원으로 지난해(8307억 원)에 이어 2년 연속 흑자가 확실시되고 있다. 솔리다임의 흑자 폭은 내년에는 더 커질 예정이다. 금융투자 업계는 2026년에는 매출 11조 8000억 원, 순이익 1조 4000억 원으로 SK가 인수한 후 최대 성과를 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솔리다임의 부활은 극적이다. 호실적을 이어가는 솔리다임의 모습은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SK하이닉스는 2021년 말 인텔 낸드사업부를 약 10조 6000억 원에 인수했다. 하지만 곧바로 업황이 수요 절벽에 직면했고 낸드플래시메모리 가격이 급락하며 실적은 직격탄을 맞았다. 업황 침체 탓에 솔리다임은 2022년과 2023년에 각각 3조 3257억 원과 4조 344억 원의 막대한 순손실을 기록했고 인수 이후 누적 적자만 7조 원을 넘기도 했다.
하지만 AI데이터센터 시장의 패러다임이 전환하면서 솔리다임은 반등의 기회를 잡았다. 그동안 기업들은 데이터센터의 저장장치를 구분해서 사용해왔다. 즉각 처리가 필요한 핫 데이터(Hot Data)는 속도가 빠른 고성능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장기 보관용 콜드 데이터(Cold Data)는 가격이 싼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에 저장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AI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저장장치 시장의 수요도 급변했다. AI 시장은 이미 학습한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데이터에 대해 예측하고 판단하는 ‘추론 시대’로 진화했고 이에 맞춰 콜드 데이터의 중요성도 높아졌다. AI가 참고해야 할 방대한 자료 저장소가 필요하고 접속 빈도 역시 급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콜드 데이터 저장용 HDD의 주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기존에 수요가 줄어 있던 HDD는 공급 한계에 직면한 상황이다. 기업들은 현재 HDD를 대량 주문하면 약 1년을 기다려야 제품을 수령할 수 있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서 HDD의 가격도 치솟았다.
HDD 품귀 현상은 적자의 늪에 빠져 있던 솔리다임에는 기회가 됐다. 솔리다임은 하나의 셀에 4비트의 데이터를 저장하는 쿼드레벨셀(QLC) SSD를 생산하는 업체다. 그동안 QLC SSD는 HDD보다 가격이 3배 이상 비쌌다. 하지만 최근 품귀 현상으로 HDD의 가격이 치솟으면서 시장 수요가 QLC SSD로 쏟아지고 있다. AI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해 비싸더라도 두 달이면 받을 수 있는 QLC SSD를 사려는 수요가 급증하며 솔리다임의 실적도 개선되고 있다. 나아가 솔리다임이 향후 2년 이상 호실적을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AI 서버 투자 확대에 힘입어 QLC SSD의 호황이 2027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솔리다임이 부활하자 경쟁 업체들도 잇따라 QLC SSD 생산에 나서고 있다. 미국 마이크론과 일본 키옥시아 등도 QLC 전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트리플레벨셀(TLC) 낸드에 집중하며 시장을 지배해왔던 삼성전자(005930)도 QLC SSD의 비중을 높일 것으로 보인다.
경쟁사들의 추격에도 QLC SSD 시장은 솔리다임과 SK하이닉스가 주도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LS증권은 SK하이닉스 연합군의 QLC 비중이 올해 42%에서 내년 51%로 과반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업계 관계자는 “AI가 연 예상치 못한 시장 변화에 SK하이닉스의 전략이 완벽히 부합한 결과”라며 “AI 추론 시장이 열어준 이번 기회에 낸드 시장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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