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었던 1940년 대 지프는 전쟁 내내 병사들의 곁을 지켰다. 4륜 구동을 앞세운 민첩한 기동력은 진흙탕과 돌길을 가볍게 넘었고, 단순하게 설계된 차량 구조는 전투 중에도 손쉽게 고칠 수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태평양 전선의 역전극 등 전쟁의 중요한 순간에도 지프는 연합군과 함께 했다. 전쟁 동안 물자와 병사들을 연신 옮겨 날라준 지프를 당시 사람들은 ‘자유의 수호자’라고 불렀다.
전후에도 지프의 명성은 이어졌다. 전장에서 증명한 성능을 바탕으로 일반 시장에 뛰어들었고 1960년대 체로키 라인을 선보이며 오늘날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시장의 초석을 쌓았다. 넉넉한 공간과 뛰어난 주행 성능에 모험을 즐기는 소비자들은 매료됐다. 지프는 자연스럽게 자유로운 삶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랭글러(Wrangler)’는 이같은 지프의 혈통을 가장 순수하게 이어받은 모델로 꼽힌다. 1980년 대 처음 공개된 이후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프로더의 대명사로 불리는 차량이다. ‘지상 최강의 SUV’로 불리는 랭글러 루비콘의 투스카데로 에디션을 탑승하고 서울 강남구에서 근교를 돌며 100㎞가량을 시승했다.
랭글러 투스카데로 에디션의 매력은 탑승하기 전부터 시작됐다. 투스카데로 에디션은 깊고 강렬한 크로마틱 마젠타(고채도의 진한 핑크색) 컬러로 주차장의 수많은 차량들 사이에서도 단연 존재감을 뽐냈다. 일반적으로 핑크색 차량은 가볍고 장난스러운 느낌을 주기 마련인데 투스카데로 에디션은 오히려 고급스럽고 무게감 있는 느낌을 다. 거대한 보닛 위의 각진 실루엣, 세븐-슬롯 그릴과 원형 LED 헤드램프도 이전 모델보다 슬림해지면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시동을 걸자 묵직한 엔진음이 울러 퍼졌다. 랭글러에 탑재된 2.0ℓ 직렬 4기통 가솔린 터보 엔진은 최고출력 272마력, 최대 토크 40.8㎏·m을 달성했다. 가속 페달을 깊게 밟자 차체는 힘차게 치고 나갔다. ‘오프로드는 뛰어나지만 도심 주행은 불편하다’는 랭글러에 대한 인식을 깨부수듯 주행 질감은 부드럽고 안정적이었다. 고속 주행에서도 흔들림이 줄었고 방음 성능도 강화돼 실내 정숙성도 크게 좋아졌다는 게 체감됐다.
하지만 랭글러의 진가는 역시 흙먼지를 마주할 때 드러났다. 오프로드의 오르막과 내리막에서 8단 자동변속기와 저단 기어비가 효과적으로 작동해 안정적인 힘을 발휘했다. 자갈길을 넘고 진흙탕을 가르는 순간에도 전자식 디퍼렌셜 잠금장치와 스웨이바 분리 기능이 즉각 반응해 차체가 기울지 않도록 잡아줬다. 차량에 탑재된 락-트랙 HD 풀타임 4WD 시스템이 작동한 덕이었다. 아울러 셀렉-스피드 컨트롤 기능을 활성화하자 차량은 1~8㎞/h 범위에서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가속 패달이나 브레이크에 발을 얹을 필요가 없고 스티어링 휠의 감각에만 집중하면 험로를 쉽게 주파할 수 있었다.
랭글러 실내도 이전 세대와의 차이가 확연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앞 좌석 중앙에 위치한 12.3인치 대시보드다. 이전 모델보다 반응 속도가 5배 빨라진 유커넥트5 시스템이 탑재됐으며 무선 애플 카플레이·안드로이드 오토를 동시에 지원해 ‘투박한 오프로더’라는 이미지를 깼다. 국내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티맵 내비게이션도 기본 내장해 편의성을 높였다.
편의 사양도 크게 강화됐다. 전동 조절 시트와 열선 시트, 열선 스티어링 휠이 기본 적용돼 추운 날씨에도 부담이 없다. 고급 사양인 나파 가죽 시트는 장거리 주행의 피로를 줄였다. 단단한 차체와 대비되는 부드러운 착좌감 덕분에 ‘험지용 SUV’라는 이미지 대신 프리미엄 SUV의 인상을 줬다.
랭글러만의 상징인 개방감은 놓치지 않았다. 버튼 하나로 열리는 ‘스카이 원-터치 파워탑’은 주행 중에도 자유롭게 하늘을 열 수 있었다. 시속 96㎞에서도 루프를 개방할 수 있게 설계됐다.
아울러 안전 사양은 대폭 확대했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전방 충돌 경고, 사각지대 모니터링, 사이드 커튼 에어백 등이 기본으로 제공돼 도심 주행에서의 불안감을 덜었다. 거대한 차체에도 불구하고 주차 보조 기능과 카메라 시스템 덕분에 좁은 공간에서도 주차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아쉬운 점은 연비다. 랭글러의 공인 복합연비는 트림에 따라 7.5~8.2㎞/ℓ 수준이다. 기름값을 고려하면 다소 부담스러운 수치다. 자유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차량인 랭글러의 소유주가 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요소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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