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반도체 분야에 ‘100% 관세’ 카드를 꺼낸 배경에는 ‘다시 미국 반도체를 위대하게(Make Ameria Chip Great Again)’라는 전략이 숨어 있다. 인공지능(AI) 칩 분야에서 미국은 엔비디아 등 강자를 앞세워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반도체 제조 생태계에서는 한국·대만·일본·네덜란드 등에 밀려난 후진국 신세이기 때문이다. 경제 부처의 한 고위 관계자는 18일 “미국의 목표는 결국 더 많은 반도체 팹을 자국으로 들여와 궁극적으로 생산 밸류체인을 복원하는 것”이라며 “삼성과 TSMC가 투자하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는 물론이고 메모리, 궁극적으로는 장비 업체들까지 미국 투자 압박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미국의 반도체 관세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긴급 대응에 착수했다. 최우선 목표는 미국과 대만이 맺은 관세 협상을 기반으로 우리나라가 더 불리하지 않는 대우를 받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체결한 한미 관세협상 공동 설명자료(조인트 팩트시트)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산업통상부의 한 관계자는 “원칙에 따라 한국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하도록 논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대만 정부가 2500억 달러(약 370조 원)에 달하는 반도체 분야 투자를 조건으로 무역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는 점이다. 반도체 관세는 대미 투자기업에 한해 면제하되 대상 물량은 기업의 미국 현지 생산 능력(건설 중 기업 2.5배, 건설 후 기업 1.5배)에 연동해 적용하기로 했다. 가령 대만 TSMC가 미국 현지에서 웨이퍼 10만 장 규모의 생산시설을 짓는다고 가정할 경우 이 공장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웨이퍼 25만 장분 수입 반도체에 대해 관세를 면제해주고 공장 건립이 마무리 되면 15만 장까지 관세를 깎아주는 식이다. 이 조항이 우리 업체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미국 현지 투자를 더 많이 늘려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는 셈이다.
이 같은 불확실성이 지난 협상 결과에서 어느 정도 예고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교부 2차관을 지낸 이태호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미국은 반도체 부문에서는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제공할 ‘의향이 있다(intend to)’고 명시했다”며 “협상에서 의무성을 조금 회피하면서 방향성을 명시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상황에 따라 최혜국(MFN·Most-Favored-Nation) 규정이 담긴 협상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뒀다는 의미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반도체 후속 협상도 대만을 기준점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파운드리뿐 아니라 메모리반도체까지 현지에서 생산하라고 압박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16일(현지 시간) 뉴욕주 마이크론 신규 공장 착공식에 참석해 “메모리반도체를 생산하려는 기업에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다”며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특정 국가나 기업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한국을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발언이다.
다만 이 발언만 놓고 보면 미국에 메모리 팹까지 더 지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파운드리·패키징 등 다른 공정의 생산시설을 더 지으라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반도체 장비 업체의 한 관계자는 “최근 미국에서는 AI 연산 능력이 고도화될수록 메모리가 더 중요해진다는 사실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미국이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선단 제품까지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산업통상부 역시 미국과 대만이 서로 합의한 팩트시트가 나올 때까지는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한국이 기존의 투자 성과를 최대한 인정받는 것이 향후 협상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결국 미국은 역내 투자를 더 이끌어내려고 할 텐데 이미 발표한 대규모 투자 계획에 포함된 설비의 생산능력도 무관세 물량 산정에 포함되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삼성전자 텍사스 오스틴 공장처럼 기존 투자 실적이 최대한 인정돼야 한국 기업 부담이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최근 반도체는 공급자 우위 시장이므로 무조건 저자세로 협상에 임할 필요가 없다는 조언도 나왔다. 이 고문은 “현지 투자를 조건으로 개별 기업별 관세를 다르게 하겠다는 것은 전례 없는 조치”라면서 “미국도 산업 부흥을 위해 반도체가 절실한 만큼 정교한 전략을 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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