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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를 소유한 AOL 타임워너 그룹의 「뉴라인 시네마」가 공급하는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 제 2편이 이달 말 개봉된다. 제 2편에서는 영화 역사상 최대 규모인 헬름 협곡 대전투 장면이 펼쳐진다. 2편에서는 영화장면이 좀 더 어두운 색채를 띈다.
인간과 오합지졸 동맹군들은 중간계를 지배하려는 거대한 군에 가담한다. 인간과 호빗, 마법사들, 난장이와 요정들은 오크족과 링뤠이스족,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엄청난 군대와의 전투에 동원된다.
5만 명에 달하는 이 지상의 전사들은 사실상 컴퓨터로 합성한 소수의 캐릭터들로 이루어졌다. 전투는 거대한 협곡을 덮으며 퍼져 나간다. 번갯불과 빗줄기가 한밤의 대전투에 쏟아져 내린다. 전사들은 요새 방벽에 기대어진 사다리에서 접전을 벌인다.
이 전투는 컴퓨터를 이용한 영화 제작의 한 분기점이 되었다. 전투 장면들은 디지털 아트의 야심찬 작업 분야다. 병사들이 대규모로 접전을 벌일 때 연출되는 무질서와 의도된 행위들은 대단히 복잡하다. ‘숫자를 수천 명으로 늘리고 각 전사들이 스크린상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할 것’. 이것이 바로 대담한 영화감독 잭슨이 프로그래머들에게 요구한 사항이었다. 만약 이렇게만 된다면 이 장면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컴퓨터그래픽 장면이 될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기술이 필요했다.
“캐릭터들이 상당히 미세하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기가 힘들었다”고 칼 심스는 토로한다. 그는 MIT 연구원 출신으로 지난 94년 자신의 논문 <진화형 가상 생명체>에서 디지털 애니메이터들이 해야 할 주요 과제를 개략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인간과 인조인간 형체를 제작하려면 최고 수준의 컴퓨터 그래픽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관객들은 사람의 움직임을 상당히 복잡하게 추적해내기 때문이다. 심스는 지금까지 영화제작자들이 작은 캐릭터의 경우 잘 만들어왔다고 평가했다. 사람 시뮬레이션보다도 작은 곤충 떼를 시뮬레이션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비교적 간단한 물리적 상호작용의 시뮬레이션이 주도해 왔다. 인력과 척력을 조절하는 기본적 규칙을 이용해 디자이너들은 입자라는 단일 점들이 서로 대치되게 했다. 각 입자는 서로 다른 개체를 나타내는데 소그룹이나 대규모 군중을 묘사할 정도의 혼합이 이루어지면 애니메이션이 첨가된다. 이 입자가 디지털 인간이나 생명체로 변신하게 된다. 따라서 제작비는 절감되지만 자연스런 모습이 나오지 않을 경우도 있다. 입자의 궤적은 2차원 공간상의 당구대에서와 같은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실제 사람의 움직임은 특히 험한 지역에서 전투를 하는 경우 구현하기가 훨씬 더 복잡하다.
피터 잭슨은 헐리우드가 아닌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영화를 촬영하며 색다른 접근법을 시도했다. 잭슨은 이미 96년 특수효과가 많이 사용된 영화 <무서운 영화>에서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인 바 있다. 그는 이 영화의 효과 제작을 위해 WETA사에 의뢰했다. 이 회사는 그가 93년 시작한 뉴질랜드 조지 루카스 인더스트리얼 라이트 앤 매직사이기도 했다. 96년 잭슨은 무서운 사람들의 기술 감독을 맡았던 동료 뉴질랜드인 스테판 리젤러스에게 <반지의 제왕> 3부작 첫 작품인 <반지의 제왕 :반지의 우정> 제작에서 군중 감독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리젤러스는 입자를 이용한 제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식상해 있던 터였다. MIT의 심스와 중세 전투를 연구하는 인공 생명체 이론가들로부터 감명을 받은 리젤러스는 그후 몇 년 동안 군중들의 상호 작용을 다루는 매시브(Massive)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군중들간의 상호 작용이 입자 역학보다는 한 장면에 등장하는 각 캐릭터들의 자발적이고 독특한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게 한다. 매시브 프로그램은 기계적인 동작을 복제하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각 캐릭터에게 ‘디지털 두뇌’를 부여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준다. 인공지능 측면에서 보면 헬름협곡 전투에서 싸우는 캐릭터들은 실제로 전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접근법은 ‘잘라 붙이는’ 편집 작업이 적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첫 부분의 인상적인 콜로세움 군중들은 200명의 실제 엑스트라를 복제한 후 디지털로 변조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복제된 구경꾼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매시브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사실적으로 보이기 위해 각 캐릭터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리젤러스는 “만약 오크족 한 명이 자연스럽게 행동을 하면 나머지들도 따라 하게 된다”고 말한다.
오크족 전사가 디지털 전투에서 요정과 마주쳐도 상대방은 서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요정이 검을 휘두를 수도 있겠지만 언제 그렇게 해야 할까? 상대방은 지켜보다가 몸을 숙여 피하거나 그대로 있을 수도 있다. 요정이 앞쪽으로 뛰어 들자 오크는 움츠러든다. 그러자 이번엔 요정이 일격을 가해 오크를 해치운다. 전체 전투의 결과는 이야기 줄거리에 따라 대략 미리 설정되어 있지만 각 장면들은 프로그램의 자발성이라는 특성에 따르게 된다. 각 동작은 바로 전 동작으로부터 비롯된다.
매시브 캐릭터 또는 ‘에이전트’들은 물리적 힘의 영향을 받는 복잡한 생명체 기능을 한다. 이들은 생물학(키가 작거나 뛰어난 시력, 검은 피부)적으로나 행동(공격적)상, 신체에 특징들이 있다. 이러한 특징에 따라 매시브의 캐릭터는 인간과 같은 동작을 할 수가 있다. 각 캐릭터에는 검을 들거나 내린다던가 앞이나 뒤로 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350가지나 되는 동작들이 할당되는데 각 동작은 1초 정도 지속된다. 이런 동작이 연출되는 방식은 이 캐릭터의 디지털 두뇌에 의해 결정된다. 100개부터 많게는 8천 개에 달하는 행동 논리로 연결된 이 두뇌는 각 캐릭터가 주변 상황을 인식하고 해석해 대응하는 규칙을 제공한다. 즉, ‘결정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마디들은 몇 가지 규칙군으로 나뉘는데, 이 규칙군들이 공격과 전투 스타일, 변화된 지역에서의 움직임과 다른 여러 요인들을 제어한다. 리젤러스는 원래 펜과 종이를 사용해 한 캐릭터 내의 마디간 관계를 스케치 해보려 했다. 하지만 금세 뒤엉킨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매시브 디자이너들은 이제 특수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이용해서 마디들을 연결해 에이전트의 두뇌를 생성해낸다. 완성된 캐릭터는 경향과 개성을 담고 있는 지도로 스크린상에 커다란 복차원 거미줄처럼 표시된다.
이런 캐릭터들은 단순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매시브는 가변 데이터와 무한한 알고리즘상의 가능성을 수용하기 위해 퍼지 논리를 사용한다. 퍼지 논리는 임의적이고 가변적인 사건을 만들어 내 예측할 수 없는 요소를 디지털 장면에 도입함으로써 그 결과를 ‘훨씬 더 사실적’으로 보이게 해 준다고 리젤러스는 말한다. 매시브 궁수는 그냥 표적을 맞히거나 못 맞히는 게 아니다. 각 화살이 약간씩 다르게 임의의 방향으로 날아가도록 조준하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복잡하고 때론 서로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 좌우된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으로 입력된 활쏘기 실력이나 날씨, 혹은 순간 기분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단 한 개의 화살이라도 과녁에 맞을지 여부를 결코 알 수 없다.
그런데다 행동 특성도 변한다. 매시브로 제작된 캐릭터들이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는 이들에게 입력되는 정보가 주변의 디지털 풍경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각 캐릭터는 전장터를 돌아다니기 위해 필요한 눈과 귀가 있다. 헬름협곡에서 중간계의 가장 끔찍한 생물들인 우룩 하이 돌연변이 전사들은 진군을 하는 동안 콧노래를 한다. 이 효과가 왠지 느낌이 안 좋아 오디오 신호로 이 디지털 생물체들이 서로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한다고 리젤러스는 말한다. 한 전사가 가까이 오면 콧노래 소리가 또렷해져 옆의 전사가 길을 비켜준다.
일단 생성이 되면 매시브 캐릭터들은 인적이 드문 장면에 삽입된다. 이 캐릭터들을 원래 의도대로 행동하도록 놔두면 전투 장면이 저절로 완성된다. 작업 시간은 장면의 크기와 복잡도에 따라 수분에서 하루가 걸리기도 한다. 일반적인 경향 외에 필름 제작자들도 각 캐릭터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
각 캐릭터는 스스로 움직이고 디지털 배경 안에서 스스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리젤러스의 랩톱 컴퓨터에는 영화의 첫 부분이 들어 있는데, 이 장면에서 오크와 한 인간이 너무 정교한 전투와 장애물 회피 모듈 덕분에 기묘하게 춤을 추기 시작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디지털 상대들은 접근해서 원을 그리며 무기를 휘둘러 대지만 결코 부딪히지 않는다. 또다른 초기 시뮬레이션에서 잭슨과 리젤러스는 수천 명의 캐릭터들이 처절하게 싸우는 와중에 뒷배경의 일부 전사들이 생각을 바꿔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행동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잭슨은 이를 두고 “놀랄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돌발 사태를 피하기 위해 매시브 프로그래머들은 효과 없는 에이전트들을 솎아내고 제대로 작동하는 것들만 복제했다. 10명 정도의 초기 마스터 캐릭터들로 기본적인 유전적 청사진을 만들어 5만 명의 디지털 복제본을 만든 다음 공격성과 행복감 같은 무작위 변수들을 첨가해 각 캐릭터에 개성을 부여했다(약간 업데이트된 판 ; 두 개의 탑 배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전투 도중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를 유심히 볼 것).
퍼지 논리와 복잡한 논리 마디에도 불구하고 이 캐릭터들의 전투결과는 미리 정해져 있다. 승리할 팀은 이기는 데 필요한 디지털 DNA를 최초에 부여받는다. 장면들은 통제가 보다 용이한 작은 요소들로 세분화되고 전후 연결을 매끄럽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성향의 에이전트들이 선택된다. 소프트웨어가 발전됨에 따라 영화의 기술 감독들은 눈에 띄지 않게 에이전트들을 변형해 동작과 반응을 생성시킴으로써 이미 연출된 뒷부분의 작은 결함들을 손질하는 방법이 알려졌다.
영화에서 오크군은 성벽 앞에 서서 창으로 땅을 쿵쿵 내리치고 있다. 비는 쏟아지고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번갯불만이 헬멧에 반사되어 보인다. 전투가 시작되면서 화면 전체로 퍼져 나가다가 모두가 지칠 즈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오크족들의 사다리 오르는 모습을 잘 지켜보자. 복잡한 신체적 움직임이 점 기반의 디지털 캐릭터에게는 구현하기 힘든 기술이지만 매시브로 만들어내기는 훨씬 쉽다. 리젤러스는 앞으로 이런 장면들이 영화에서 많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입자 기반의 효과에서는 캐릭터들이 거친 지역에서 걷는 모습이 거의 없다. 어색해 보이기 때문이다. 매시브 에이전트들은 보다 민첩하다(랩톱 컴퓨터에서 리젤러스가 한 캐릭터가 걸어 지나가고 있는 풍경을 바꾸자 컴퓨터로 생성된 이 막대 인물은 멈칫거리지 않고 능숙하게 나아간다).
리젤러스는 그가 현재 영화제작 스튜디오들에 보여주고 있는 차세대 버전의 매시브가 훨씬 더 강력해져 캐릭터들이 진화할 수 있는 요소들도 포함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편 다른 개발자들은 정교한 의사결정 능력을 자신들의 디지털 캐릭터에 넣고 있다. 한 예로 가장 최근에 나온 스타 워즈 속편 제작과정에서는 3만 명의 입자 기반 캐릭터들마다 고유한 동작을 부여하기 위해서 인공지능을 사용해 큰 효과를 보았다. <에피소드 Ⅲ>에서는 더 많은 발전이 있으리라 예상된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왕의 귀환>에서 절정에 다다를 전투(헬름협곡 전투는 서막에 불과하다)에서는 10만 명이 넘는 캐릭터들이 동원될 거라고 한다.
이달 18일 관객들이 보게 될 것은 디지털 캐릭터 창조의 새로운 도약이 될 것이다. 이 캐릭터들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관객들은 이들과 실제 헐리우드 배우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이미 20년 전 영화 <트론>으로 시작되었다. “지금은 캐릭터가합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지만 곧 구분이 불가능한 시기가 올 것이기 때문에 영화가 더 흥미로워 질 것”이라고 칼 심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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