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재료인 실리콘 박막의 두께가 10나노미터 이하로 얇아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물리학자들은 양자현상 때문에 전자의 흐름의 통제할 수 없어 0과 1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말한다.
그 해결책으로 주목 받는 것이 바로 ‘양자컴퓨터’(Quantum Computer)다. 과학기술과 정보기술(IT) 산업에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올 양자컴퓨터는 과연 어떻게 구현되고 어디까지 개발되고 있을까.
양자컴퓨터란
현재의 컴퓨터는 전류나 전압의 고저로 나타나는 ‘0’과 ‘1’을 이용해 정보를 저장한다. 이를 ‘비트’(bit)라고 부른다.
양자컴퓨터의 기본단위는 ‘큐비트’(qubitㆍquantum bit). 큐비트는 0과 1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양자 스위치 단위. 하나의 스위치(1큐비트)는 한꺼번에 두 개의 계산을 해 낼 수 있다. 만약 2큐비트라면 한번에 4가지 계산을, 3큐비트라면 8개의 계산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자를 스위치로 이용할 경우 ‘스핀’이라 불리는 자극이 위를 가리킬 때(UP)를 ‘0’, 아래를 가리킬 때(DOWN)를 ‘1’로 설정하면 된다. 또 큐비트로 쓰일 분자를 자기장에 넣고 그들을 전파로 조작하면 스핀의 상태에 관한 신호를 얻을 수 있다.
큐비트 10개를 중첩하면 1,024번, 50개를 중첩되면 2의 50제곱, 즉 1,000조번 이상의 연산을 동시에 해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지금의 컴퓨터는 말 그대로 ‘고철 덩어리’로 전락하고 만다.
예를 들어 현존하는 컴퓨터로 수 천년이 걸려야 풀어내는 암호체계도 똑같은 속도로 돌아가는 양자컴퓨터는 4분 만에 해독할 수 있다. 열심히 저축한 은행계좌가 불과 4분 만에 해킹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양자컴퓨터의 역사
양자컴퓨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은 IBM연구소에 근무했던 롤프 랜다우(1927~1999). 그는 컴퓨터에서 발생하는 열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하면 열을 없앨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전기저항이 전혀 없는 초전도체를 사용한다고 해도 반드시 열이 발생한다고 결론에 도달했다. 랜다우는 열이 발생하지 않는 양자계 연산 모델을 가정했다.
아이디어 차원의 양자컴퓨터를 체계적인 이론으로 정립한 이가 바로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1918~88). 파인만은 82년 양자 컴퓨터의 기본 개념을 제시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한동안 양자컴퓨터에 관한 연구는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양자컴퓨터가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94년. AT&T 벨연구소에 근무하던 피터 쇼어(Peter Shor)라는 연구원이 양자컴퓨터를 구현하는 소인수분해 풀이법을 발표한 것이다.
쇼어는 ‘QFT’(Quantum Fourier Transform)를 이용해 함수의 주기를 구하는 일반적 알고리즘을 고안했다. 쇼어의 알고리즘을 사용하면 큰 정수도 소인수 분해할 수 있어 양자컴퓨터 상용화 방안의 하나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양자컴퓨터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공상’이 ‘현실’로
기술 및 시장관련 조사기관인 미국의 가트너는 10~15년 안에 양자컴퓨터 기술이 부각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같은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현재 미국을 비롯한 일본ㆍ유럽에서는 양자컴퓨터의 상용화를 앞당기는 연구성과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 공상으로 치부되던 양자컴퓨터가 이제 10년 후의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양자컴퓨터 분야에서 가장 앞선 나라는 미국. 미국은 공식적으로 1년에 약 3,000만 달러를 양자컴퓨팅 기술 연구에 쏟아 붇고 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
대표적인 민간 연구기관이 IBM의 알마덴연구소. 알마덴연구소는 최근 ‘쇼어 알고리즘’을 구현하는 분자를 제조, 7큐비트 현상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현재 IBM은 매년 양자컴퓨터 워크숍을 개최하는 등 양자컴퓨터를 상용화하기 위한 연구를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외에도 미국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와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 국가안전보장국(NSA) 등 국가 연구기관에서 양자컴퓨터 기술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일본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도시바는 빛을 사용해 계산 과정을 제어하는 새로운 개념의 양자컴퓨터를 고안, 실용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기초적 실험을 통해 그 가능성을 확인한 상태.
미국과 일본의 공동열기도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해 스탠퍼드대학 중심으로 하버드대, 게이오대, NTT 등 산학 공동연구팀이 결성, 특수 실리콘을 사용하는 양자컴퓨터의 연구개발을 시작한 것.
이번 프로젝트에서 게이오대는 재료 개발, 하버드대는 양자 계산의 이론 정립, NTT는 제어장치 개발, 스탠퍼드는 컴퓨터 제작을 각각 맡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미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DARPA)과 일본 과학기술진흥사업단 등으로부터 연구자금을 지원 받고 있다. 우선 10년 안에 대규모 계산을 할 수 있는 실험 장치의 개발이 목표다.
영국은 옥스퍼드 대학에 양자컴퓨터센터(큐비트 그룹)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스라엘·인도·호주·중국 등도 국가 차원의 양자컴퓨터 개발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아마추어’
우리나라에서는 대학과 일부 연구소에서 초보적인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뿐이다.
과학기술부의 지원을 받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양자결맞음초고속정보통신연구단(단장 함병승 박사)이 올해 초 빛의 속도를 45m/s 로 낮춰 양자스위치에 적용하는데 성공한 것이 가장 큰 성과. 연구단은 미국 공군연구소와 협력, 기체를 사용하던 기존 기술과는 달리 희토류가 첨가된 고체물질에 ‘검은 공진’이라는 양자광학현상을 이용, 이 같은 성과를 얻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는 두뇌과학(BK)21 사업으로 광양자정보과학사업단이 꾸려져 있으며 이순칠 교수(물리학과)가 분자를 이용한 양자컴퓨터를 과학기술부 지원으로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 지동표 교수(수학과)도 이론연구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외에도 포항공대가 ‘스핀물성 연구센터’, 서울 시립대가 ‘양자정보처리연구단’, 동국대는 ‘양자기능반도체연구센터’를 각각 운영하고 있다.
이순칠 교수는 “양자컴퓨터는 이론적으로는 가능성이 높지만 상용화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면서도 “연구결과에 따라 20년 내에 상용화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서울경제 문병도기자 d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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