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인력, 인프라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선택과 집중’ 전략은 불가피한 것이라는데, NT는 당당히 선택을 받았다. 과학기술계는 연구비를 따내기 위해, 미래에 돈되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경제계는 IT, BT 이후 증시를 끌고갈 ‘T’를 고대해 왔기 때문에 NT에 대한 관심은 단시간내에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NT가 대체 뭐길래?
나노기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너무 광범위한 일인데다 지면도 한정되어 있고 필자의 능력에도 의구심이 가는 관계로 간단하고 쉽게 알아보자. nano 란 10-9을 의미하는 접두사로 나노기술이란 10-9m 단위의 극미세기술을 뜻한다. 나노보다 더 작은 접두사로 pico(10-12), femto(10-15), ato(10-18)도 있는데 왜 하필 나노인가? 어차피 너무 작아서 느낌도 오지 않을 지경인데 아토기술(AT)라고 해버리면 더 폼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한다 해도 그럴 순 없다. 원자보다 작은 입자로만 구성된 물체(예: 중성자로만 구성된 축구공)는 지구상엔 존재할 수 없고 원자의 크기는 가장 작은 수소원자가 0.037 nm, 반도체 재료로 잘 알려진 Si 원자가 0.117 nm 로, 원자 몇 개만 모여도 수 나노미터의 크기를 갖기 때문이다(pico 미만의 접두사는 극히 짧은 시간의 단위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나노기술이란 바로 그것이다. 불과 수십 수백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극미세입자를 만들거나, 분자 한 두개로 무언가를 하거나, 원자단위로 쌓아올려 분자를 조립해나가는 기술이다. “나노기술은 85년 STM(주사터널링현미경)의 발명과 뒤이은 AFM(원자힘현미경)의 발명으로 급속히 발전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물리학과 화학의 특정 분야에서는 전혀 새로운 영역이 아니었다. 새로운 이름이긴 했지만.
NT, 손에 잡히는 느낌이 납니까?
물론, 대답은 ‘No’일 것이다. NT는 IT나 BT와는 달리, 이를 이용한 산업이 현재 융성하고 있는 기술이 아니다. 독자가 가지고 있는 PC가 최신형 펜티엄4 기종이라면, 그중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구입한 Northwood(코드명)core의 CPU가 장착된 것이라면, 그 CPU를 만드는 데에 사용된 반도체기술중 하나는 ‘0.13 m 회로선폭 기술’이다. 0.13 m는 130 nm에 해당한다. 이것은 양산이 가능한 기술수준이고, 세계 유수의 반도체 기업들은 이미 0.09 m 기술의 개발을 거의 끝냈다. 수년 내에 0.03 m 기술도 개발될 것이다. 30nm 정도면 NT의 영역에 들어오기에 충분한 수치다. 1990년대가 마이크로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본격적으로 ‘나노’가 안방에 들어온다.
그러나, 회로선폭 저감과 집적도 증대는, 엄격히 말해 NT의 영역이 아니고 관대하게 말해도 NT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NT의 중요성은 과학과 제조기술에 있어서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있다. 20세기 제조기술이 ‘Top down’ 방식으로 마이크로에 도달하고, 신물질의 합성이 경험적 반응에 의한 후보물질 다수 합성과 걸러내기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21세기의 제조기술은 ‘bottom up’ 방식으로, 기능성 분자의 합성은 미리 디자인된 분자를 조립해 나가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식각기술(lithography)를 통해 회로를 그리던 것을 원자들 스스로가 회로를 구성하도록 하며, 원자 한 개로 트랜지스터를 만들고 원자 1개에 1 bit를 저장하는 상상 속의 이야기, 원자 한 개 한 개를 조종하여 정확히 우리가 원하는 제조물을 한 개의 불량품도 없이 만들어 내는 꿈같은 일이, 이 패러다임의 변화가 가능케 하는 ‘기대’들이다.
NT는 아직 뜬구름 잡는 기술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초과학 연구자들에게 새롭게 다가온 NT는 포장을 벗겨보니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연구분야가 NT라는 때때옷을 입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실 간판에 ‘나노’를 추가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을 정도이다. NT를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된 예가 바로 ‘극미세 로봇’과 ‘초고집적 반도체 칩’이다.
전자는 세포 크기보다 작은 로봇이 몸 속을 돌아다니며 암세포와 싸우고, 보이지도 않는 자기복제 로봇이 쓰레기더미를 먹어치우며 증식한다는 것이다. ‘나노 어셈블러’라 불리는 궁극의 나노로봇은 다른 나노로봇을 조립하는 역할을 하여(효소를 연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나노 제조의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1999년 미국과 일본 연구진은 여섯 개의 단백질로 만들어진, 프로펠러가 달리고 ATP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나노 모터’를 개발, 발표함으로써 극미세로봇에 대한 기대에 불을 지폈다. 많은 과학자들이 인공 효소, 지능성 분자, 특정 분자나 이온을 인식하는 분자를 개발하고 있다.
극미세로봇이 암세포를 골라내 선택적으로 약을 투여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로봇이라는 호칭은 흥미유발적인 성격이 강하다). 초고집적 반도체 칩은 단전자 트랜지스터(SET), 심지어 1개의 원자로 구성된 트랜지스터(하버드대 박홍근 교수팀이 최근 발표)를 사용하거나, 탄소 나노튜브를 꼬아 만든 소자를 만들고, 나노튜브를 이용하거나 자기조립단일층(SAM)을 응용해 bottom-up 방식으로 수nm 선폭의 회로를 가진 칩을 만들어 현재 수준 대비 최소 100만배 이상의 집적도를 가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의료분야와 반도체분야에서의 나노기술은 얼핏 듣기에도 굉장히 화려하고, 또 다르게 생각하면 정말 꿈같은 얘기라고 여겨질 것이다. 나노기술이 실체는 없고 환상만 있는 허구라고 비판받곤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NT의 영역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다. 가장 실용화에 근접한 분야는 나노입자를 이용한 소재분야이다. 쉽게 말해서 ‘무조건 작은 입자를 만드는 것’이다. 나노입자는 원자 수십∼수백개로 이루어진, 수 nm 크기의 입자다.
나노입자는 대부분의 원자가 표면에 배열하고, 주변 원자의 개수가 적기 때문에 덩어리(bulk)와는 매우 다른 성질을 보이는데다가, 입자 크기가 작기 때문에 같은 질량에서 표면적이 극대화된다. 나노입자는 이미 촉매, 전자재료, 태양전지 등에 적용되고 있다. 나노입자는 너무나 작기 때문에 top-down 방식으로 덩어리를 으깨어서는 균일하게 만들 수 없다. 탄소나노튜브(CNT)는 비교적 최근에야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전기적 성질, 강도, 촉매 담체로서의 가능성 등 여러 면에서 주목받고 있는 나노 신소재다.
나노기술이라는 말이 시사용어사전에 등장하고 국내 신문지상에 오르내린 지 수년밖에 되지 않 았다고 해서 최근에 연구되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국내 학계에서도 물리, 화학, 재료분야에서 이미 나노 레벨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극미세로봇이 질병 치료에 사용되려면 앞으로 몇 십년이 걸릴지 모르고, 아직 탄소나노튜브로 트랜지스터를 만들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그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이므로 벌써부터 나노기술에 대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먼 훗날의 꿈처럼 생각할 이유도 없다. 나노 촉매를 이용한 연료전지 자동차가 수년 내에 도로를 달릴 것이고, 좀 더 높은 효율의 태양전지가 개발되면 지금 탁상용 전자계산기가 그러하듯 핸드헬드기기도 배터리가 필요없게 될지 모른다. TiO2(산화티타늄) 나노입자를 포함한 건물 외벽 타일은 때가 타도 광분해되어 항상 반짝거릴 것이고,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평면디스플레이장치는 얇고 가벼우면서도 CRT(Cathod Ray Tube)수준의 휘도와 대비를 갖고 심지어 말아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고, 수십년되지 않아 누릴 수 있는 나노기술의 혜택이 될 것이다.
그래도 NT엔 거품이 있다
나노기술에 대해 어렵다거나 막연하다는 느낌을 가졌던 독자라면, 이 글을 읽으면서 “별 것 아니네”라는 생각을 하길 기대한다. 거창하다면 너무나 거창하고, 그렇지 않다면 이미 우리 삶에서 멀지 않은 분야가 나노기술이다.
우리나라에서 NT는 선택받은 분야이지만, 실제 진행되고 있는 큰 규모의 연구 프로젝트는 2000년 7월 착수된 ‘테라급나노소자개발사업’이 유일하다. 메모리반도체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므로, 이 분야에 집중하겠다는 좋은 의도로 기획된 사업이다. 달리 말하자면, 반도체분야 외의 나노기술분야에 대한 국가적 투자는 극히 미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나노기술의 본질이 물리, 화학과 재료의 기초분야와 통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NT에 대한 투자는 날로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는 국내 기초과학 연구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학계 일각에선 반도체분야에 집중된 나노기술 연구에 시샘어린 비판적 시각을 갖기도 하는데, 분자 수준 신개념 전자소자와 나노패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국내 여건상, 투자되는 천문학적 액수의 연구비가 진정한 의미의 나노기술이 아닌 기존 기술을 이용한 고집적화가 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다. 갑자기 나노기술전문가가 배출되거나 수입된 게 아니라면 ‘이름만 나노 아니냐’는 것이다. 또, “대만과 미국 일부 기업에서 이미 수십 나노미터 회로선폭기술 개발을 발표하고 있는데 그 나노와 이 나노는 무엇이 다른가?” 하는 소위 ‘나노기술 무용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모두가 나노기술에 대한 얕은 이해가 낳은 결과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노기술은 갑자기 튀어나온 기술이 아니고, 막연한 미래 기술도 아니지만, 당장 돈 되는 기술도 아니다. 어떠한 다른 ‘T’ 들보다 기초과학에 가까운 분야라는 점에서 꾸준한 관심과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몇 년만에 수백만 가구에 초고속인터넷 회선 깔 듯 해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등 선진국이 한다니까 우리도 일단 돈을 들이붓자는 식으로 투자가 이루어져선 곤란하다. 적어도 50년을 내다보고 기초부터 튼튼히 투자해야한다. ‘원자 한 개 한 개를 쌓아가는 심정’으로 하면 된다. NT가 바로 그런 분야기 때문이다.
박상욱 (한국과학기술인연합 www.scieng.net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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