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은 우표 크기 만한 DNA 칩이라는 분석장치가 가능하게 할 것이다. DNA 칩은 말 그대로 인간의 유전정보인 디옥시리보핵산(DNA)을 컴퓨터의 반도체 칩 기술을 응용하여 우표크기의 판 위에 심어 놓은 장치이다. 이 칩에 검사대상자의 혈액이나 조직 등에서 추출한 DNA 샘플을 반응시켜 그 결과를 컴퓨터로 처리한다. 그 결과 기존 방법으로는 며칠씩 걸리던 검사가 몇 분 안에 끝난다.
유전자칩M
사람의 유전정보인 게놈은 23쌍의 염색체에 들어 있다. 이 염색체는 약 30억 개의 염기로 구성된 DNA가 고무줄처럼 서로 엉킨 상태로 있는 것이며, 이 DNA 가닥들이 약 10만여 개의 유전자를 구성하고 있다. DNA의 염기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 등 네 가지 종류이다. 이 중 아데닌은 티민과, 구아닌은 시토신과 화학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DNA는 서로 맞는 염기끼리의 결합에 의해 두 가닥이 서로 붙어 나선형으로 꼬여 있는 형태이다.
DNA의 유전정보가 발현되는 것은 나선형 가닥이 풀리면서 한 가닥씩 복제되고, 복제된 DNA 염기들이 3개씩 짝을 이루어 아미노산을 하나씩 가져와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이다. 네 종류의 염기를 세 개씩 짝짓는 방법은 무수히 많으므로, 다양한 순서로 아미노산들을 실에 구슬을 꿰는 것처럼 연결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 몸 곳곳에서 필요한 다양한 단백질이 만들어지게 된다. 단백질은 우리 몸의 구성성분으로 인체조직 대부분을 이루고, 모든 신진대사 작용을 일으키는 촉매인 효소들도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DNA는 생명의 정보창고인 것이다.
DNA칩의 시작
현미경 슬라이드 글래스와 비슷한 기판 위에 수많은 DNA 조각이 붙어 있는 것이 바로 DNA 칩이다. 1994년 미국의 어피메트릭(Affymetrix)사가 처음 만든 DNA 칩(GeneChip)은 2만개의 DNA 탐식기(probe)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약 40만개에 이른다. 이 DNA 칩과 형광 색소 등으로 표시한 샘플 DNA를 반응(hybridization)시키면 서로 맞는 DNA끼리 결합하여 그 부위가 빛을 낸다. 이 빛을 고해상도로 해석하는 레이저 해석장치로 읽어내어 원래의 DNA로부터 샘플 DNA의 정보를 추정한다. 이 정보가 질환의 예방과 진단, 의약품의 개발에 새로운 길을 열게 된다.
내 몸에 맞는 맞춤형 치료제
에이즈의 원인이 되는 HIV 돌연변이는 두 가지 효소의 이상을 보인다. 그러나 그 양상은 동일하지 않아 60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형태가 있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동일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가 없다. 미국 어피메트릭사의 HIV 칩은 환자들의 서로 다른 돌연변이를 검사하여 각자에게 적절한 약물이나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게 한다. 칩을 이용한 검사는 기존의 가장 빠른 검사보다 10배 이상 더 빠르다.
암 억제유전자의 돌연변이 검사
또 암 억제유전자인 p53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암 유발에 절반이상의 책임이 있다. 그런데 p53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무려 1,000가지 이상이다. HIV 돌연변이와 마찬가지로 칩은 p53유전자의 독특한 돌연변이들을 검사하여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한다.
또한 이 유전자의 변이에 의하지 않은 암 환자도 찾아내어 유전자 변이성 암 환자에게 적용하는 치료법을 피할 수 있다. 보통 유전자 변이성 암 환자의 치료법은 방사선 요법과 약물용법이 결합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검사는 비유전자 변이성 환자에게 아주 유용한 것이다. 칩에 의한 검사는 결국 치료의 효율성을 높이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치료 기간도 단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바이러스성 질환의 검사에도 이용된다. 인체에 침입한 바이러스는 수많은 돌연변이가 있으므로 칩을 이용한 검사는 적절한 항 바이러스 약품개발에 중요하다.
DNA 칩은 유전자의 염기서열의 이상에 의한 돌연변이 외에 유전자 발현도 검사할 수 있다. 예전보다 1000배 이상의 속도로 칩은 암세포가 자랄 때 어떤 유전자가 발현되는지를 검사한다. 이러한 검사에 기반하여 최근 과학자들은 암 유발 유전자의 발현정도를 추적하여 수술 등 치료를 하는데 가장 적당한 시기를 정하는 칩도 개발하고 있다. 이 칩은 특히 조직세포(Tissue) 칩이라 불리는데, 암세포로부터 얻은 DNA, RNA, 단백질 등의 분자들을 칩 위에 붙여서 암 발생과정을 추적한다. 이 칩은 동시에 1000개 이상의 조직 샘플을 검사할 수 있어 암의 발전 정도를 쉽게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암세포의 발현 과정에서 결정적인 분자의 대사과정을 검사할 수 있어 진단뿐 아니라 치료법의 개발에도 기여한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
정상 유전자를 붙인 칩과 환자의 유전자를 반응시켜 질병 유전자를 알아내는 방법도 있지만, 유전자 돌연변이를 알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인체에 대한 모든 정보가 있을 때 더욱 효과적이다. 그래서 인체의 모든 유전정보(게놈)를 알고자 시작된 휴먼게놈프로젝트는 유전자검사와 유전지도작성기술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그리고 기존의 지루한 검사 방법은 수퍼 컴퓨터를 이용한 유전정보 분석방법의 획기적인 발전과 DNA 칩을 이용한 검사 속도의 증가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수년 이내에 인간의 모든 유전자에 대한 지도가 완성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밝혀진 유전 지도를 이용하여 다시 DNA 칩은 각 유전자의 의미를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인체게놈연구소
또한 이전에는 질병과 유전자 변이의 연관성을 밝히는데 있어서 비용과 시간 때문에 소수 샘플만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으나, DNA 칩 가격이 점점 내려가고 있고 검사 속도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많은 검사 대상자를 짧은 시간에 적은 비용으로 검사할 수 있다. 다수의 검사 표본은 질병과 유전자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의 신뢰성을 높여줄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칩은 모든 질병에 대한 개개인의 발병 여부를 검사하는 데까지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국립보건원의 인체게놈연구소는 DNA 칩에 붙인 인간 유전자 정보를 이용하여 침팬지, 고릴라 등 유인원의 게놈 분석을 하고 있다. 인간과 침팬지는 1.5%의 유전자 염기서열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기존에 밝혀진 인간 유전자를 칩에 붙여 유인원의 게놈을 짧은 시간 안에 분석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를 유전자 수준에서 연구할 수 있어 진화과정과 고등 인식기능의 발달 과정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바이오인포매틱스
현재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는 컴퓨터 기술을 활용해 생명공학 정보를 처리, 분석하는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 산업이 새로운 유망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개별 유전자를 다루던 기존의 유전학이나 분자생물학의 한계를 뛰어 넘어 생물의 전체 유전체인 게놈을 분석 대상으로 다루는 이른바 게놈학(Genomics)이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도 등장하였다. 새로운 산업과 학문의 중심에 바로 DNA 칩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모토로라나 휴렛 패커드사 등도 이미 이 산업에 진출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KAIST 의과학연구센터와 여러 생명공학 벤처기업들이 DNA 칩을 연구하고 있으며 몇몇 기업에서는 곧 시제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개발한 사람도 사용하는 연구자도 이 칩의 무궁무진한 활용가능성을 아직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반도체 칩이 이룩한 20세기 후반의 정보혁명을 이어받아 21세기 생명공학의 시대를 DNA 칩이 열어갈 것이라는 예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자료제공:사이언스올www.scienceall.com
한수진기자 <popsci@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