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트와 바이트로 구성된 디지털 라디오가 지금 듣는 라디오 방송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천편일률적인 내용에 식상한 청취자들의 고민을 깨끗이 해결해 줄 것이다. 다가오는 디지털 라디오 시대에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수백 개의 디지털 위성 라디오 채널 중 가장 맘에 드는 한 곳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 또 VCR로 TV 프로그램을 녹화, 나중에 시간 날 때 볼 수 있듯이 라디오 프로그램도 녹음해둘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회사 주차장에 방금 도착했다고 치자. 차에서 내리기 전에 녹음 버튼을 눌러두면 출근 때마다 즐겨 듣던 토크쇼를 퇴근길에 마저 들을 수도 있다. 보조 배터리를 쓰므로 배터리 방전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차세대 라디오는 듣기만 하는 게 아니다. 라디오에 달린 화면은 방송국 주파수나 호출 부호 말고도 음악 타이틀, 교통 정보, 날씨, 주식시세, 경기 전적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는 방송 전파를 타고 온 웹 페이지를 라디오 수신기가 저장했다가 들려주거나 보여줄 것이다.
조만간 차 안이나 부엌에까지 전자상거래가 침투해올 것이다. 마음에 드는 세차장이나 유기농산물 매장 광고가 나오면 라디오는 당장 할인 쿠폰도 인쇄해 대령할 것이다.
라디오라는 매체는 빠르고 화려한 TV와 영화에 뒤이어 디지털로 변신하고 있다. 이 디지털 공세는 두 방향에서 온다. 기존 지상파 방송사들이 협상중인 기술 표준안이 완성되면 앞으로 1∼2년 안엔 지금의 AM, FM 방송을 깨끗한 디지털 사운드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내년 여름 휴가 무렵이면 위성 라디오 방송사들은 수백 개에 해당하는 새로운 디지털 채널 네트워크로 미국 전역을 뒤덮을 전망이다.
수십 년 동안 미디어 제왕으로 군림한 라디오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라디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변담화와 오손 웰스의 <세계대전> 실록 이후 20세기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매체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지만 TV부터 최근 급부상한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매체가 라디오의 존재를 위협해왔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초의 전자 대중 매체인 라디오의 아성은 어느 매체도 넘어뜨리지 못했다.
지금 라디오 방송은 우리가 인터넷 음악을 컴퓨터에 다운로드 받는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라디오를 듣는 방식의 변화는 기존 지상파 방송국이 디지털 방송국으로 변신하는 양상으로 먼저 나타날 듯하다.
물론 기존 라디오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IBOC라는 신기술을 쓰면 기존 아날로그 AM, FM 방송을 디지털 신호와 동시에 전송할 수 있다. 라디오 방송국들은 아날로그 채널에 디지털 신호를 얻는 방식으로 청취자들의 디지털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아날로그에 익숙한 청취자들을 붙잡아둘 수 있다.
디지털 라디오가 지닌 매력은 바로 뛰어난 음질과 동일한 지역에서 더 많은 개인에게 제공하는 양질의 서비스, 그리고 각종 부대 서비스 등이다. 디지털 수신기는 방송국명과 장르에 관한 문자 데이터도 담는다. 뉴스, 스포츠, 재즈 같은 포맷 버튼을 누르면 라디오는 청취자가 원하는 방송국을 단번에 찾아준다. 노래, 가수, 앨범 이름도 문자로 뜬다. 초당 100KB에 이르는 IBOC 전송속도를 이용하면 오디오 차원을 넘는 디지털 방송을 할 수 있다.
가령 IBOC 기술자들은 CD 음질의 음악에 65KB를 할당하고 5KB는 노래 자료에 할당하며 나머지 30KB로 근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안을 검토중이다. 음악은 계속 틀어주면서 뉴스 속보, 주식시세, 경기 기록, 일기예보를 문자로 보여줄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즐겨 듣는 가수가 새로 낸 앨범이나 공연 정보에 대해 알고 싶을 때에는‘좀더 자세히’라는 버튼을 누르면 된다. 눈높이에 맞는 화면으로 보여줄 수도 있고 소리로 들려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올 라디오에 임시 저장장치를 장착하면 중간부터 들은 노래도 처음부터 녹음할 수 있다. 광고가 나오는 동안 쿠폰을 찍어내는 소형 프린터를 장착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AM, FM 방송국의 디지털 송신을 이용하면 온갖 멀티미디어 서비스가 가능하다. 가령 웹페이지를 통째로 보내면 수신기는 미리 프로그래밍한 대로 사용자가 원하는 그림, 문자, 웹페이지를 보관할 것이다. 휴대용 PC나 노트북도 안테나/튜너 PC 카드만 있으면 디지털 라디오와 멀티미디어 녹음기 역할을 할 수 있다. 영국 사이언(Psion)사는 이미 방송에 들어간 유럽의 지상파 디지털 라디오 시스템을 위한 카드를 시장에 내놓았다.
휴대폰, 휴대용 PC 같은 각종 정보기기가 이미 디지털 신호를 처리하기 때문에 디지털 정보를 보내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AM, FM 주파수대를 통해 맑은 음질을 보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FM 수신을 방해하는 문제들이 디지털 전송을 똑같이 훼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IBOC 개발진은 이 난관을 다양한 해법으로 극복할 생각이다. 한 가지 난관은 이미 돌파했다. 바로 IBOC의 표준을 정하는 문제였다.
IBOC 개발의 맞수인 루슨트 디지털라디오와 USA 디지털라디오는 금년 여름에 두 회사 및 기술력을 모두 합병하여 이비쿼티 디지털(iBiquity Digital)이라는 주체를 만들어 개발을 일원화시켰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비쿼티 디지털, 미국라디오방송체계위원회, 연방통신위원회는 청취자들이 IBOC 라디오로 모든 IBOC 방송을 청취할 수 있게 만든 기술 표준안을 작성하고 있다. 장비 제조업자들은 표준안이 마련되는 대로 송신 및 수신 장비를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일반적인 상품 개발 주기를 감안할 때 2002년 여름까지는 IBOC 디지털 라디오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지상파 방송이 지닌 수신 장애 결함을 해결하는 방안도 다각도로 연구하고 있다. 가령 IBOC 디지털 신호를 방송국 주파수 양쪽에 포함시켜 한쪽 신호를 놓쳐도 다른 쪽 신호로 받을 수 있는 방법이 그러하다. 또 약간의 시차를 두고 두 신호를 보내 디지털 방송에 영향을 주는 반사 효과를 막을 수도 있다.
이 새로운 기술을 다 이용할 수 있으려면 도대체 돈이 얼마나 들까? IBOC 개발사는 수신기 가격은 기존 아날로그 라디오보다‘약간 비싼’정도가 될 듯하다고 말한다. 이 라디오는 똑같은 주파수로 기존 아날로그 방송과 새로운 디지털 방송을 모두 수신할 예정이다.
이런 혼용 라디오가 필요한 까닭은 모든 방송국이 당장 디지털 방송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인데, 방송국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대략 3만달러에서 20만달러로 추산된다.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을 것 같다. 현재 미국에 있는 20개 상위 방송국 중에 15개사가 이비쿼티 디지털사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내년 여름이면 미국에서 처음으로 위성 디지털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다. 지상파 디지털 라디오처럼 위성 디지털 라디오도 기존 아날로그 AM, FM 방송을 청취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하지만 청취자의 다양한 취향을 겨냥한 새로운 채널을 훨씬 많이 선보일 예정이다.
위성 방송사들은 복음성가에서부터 레게, 클래식, 록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 장르를 선보일 뿐만 아니라 NPR, CNN, C-SPAN, PRI, BBC 등과 계약을 맺어 뉴스 및 심층 분석, 토크쇼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전국에 있는 청취자를 겨냥해 내보낼 계획을 갖고 있다. 심지어 여기엔 코미디 채널도 들어 있다. 그래서 약 100개 채널을 가지고 광고 없이도 시청료만으로 운영하겠다는 구상을 감히 내놓고 있는 것이다.
현재 위성 디지털 라디오 시장에서는 시리우스 라디오, XM 라디오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두 회사 모두 월 9.95달러를 받고 100개 채널을 제공한다는 전략이다. 다행히 두 회사는 전송 및 수신을 위한 기술 표준을 함께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올 위성 디지털 라디오에 가입만 하면 청취자 취향에 따라 시리우스나 XM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내년 봄쯤에 처음 나올 라디오로는 일단 둘 중 하나만 들을 수 있다. 모든 위성 라디오는 청취자가 지역 방송국으로부터 날씨, 교통, 긴급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지상파 AM, FM 수신 기능을 보유한다.
시리우스와 XM의 위성 라디오를 수신한다고 해서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추적하는 군용트럭처럼 차에 거창한 접시 안테나를 얹고 다닐 필요는 없다. 고성능 위성이 무선 스펙트럼에서 안 쓰이는 S주파수 대역으로 전송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시제품으로 나온 차량 안테나를 보면 작은 접시 만하거나 심지어 담배 한 개비 만한 것도 있다.
시리우스와 XM은 우주에서 쏘아보내는 위성 방송을 주축으로 하겠지만 지상파 방송의 도움도 일정 부분 얻어야 한다. 이들은 높은 산이나 건물로 인해 전파 장애가 발생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휴대폰 기지국과 비슷한 중계 안테나를 수백 개 설치하여 디지털 신호를 증폭할 계획을 갖고 있다. 대역폭이 초당 4Mb나 되는 위성 라디오는 주요 공략층인 2억대가 넘는 차량 소지자인 청취자들에게 푸짐한 정보를 선사할 것이다. 단, 처음 출범하는 위성 라디오는 집안에서는 들을 수 없고 일단 차안에서만 들을 수 있다.
시리우스와 XM은 또 지상파 디지털 라디오처럼 그림, 노래, 정보, 온라인쇼핑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자동차 제조업체 측은 차량과 직접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일종의 원격교신을 위한 채널을 몇 개 할당받기를 원하고 있다.
포드자동차에 따르면 자동차 문이 잠겨버린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전화 한 통화만 해 주면‘문을 열라’는 연락이 위성 디지털 신호로 전해지며, 이 신호는 문제의 차량만 해독할 수 있다. 이 원격교신 채널을 차량에 장착된 항법시스템과 연계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포드, BMW, 다임러크라이슬러, 재규어, 마즈다, 메르세데스-벤츠, 볼보는 이미 시리우스와 제휴를 맺었다. 혼다, GM은 XM에 투자했다. 주요 카스테레오 생산업체들은 두 방송 가운데 하나를 들을 수 있는 제품을 내놓을 것이다. 두 방송을 모두 들을 수 있는 제2세대 라디오 출현도 시간 문제다.
위성 디지털 라디오 가격은 어느 정도일까? 시리우스가 예상하는 위성수신기 가격은 아날로그 AM, FM 모델보다 150달러 비싼 편이다. 가격이 여기서 더 오를 가능성도 있다. BBC가 디지털 방송을 제공하는 영국의 경우 라디오 수신기 가격은 750달러에서 최고 3,000달러까지 올라간다. 여기에 월 수신료 10달러를 내야 한다.
공짜로 듣던 라디오를 과연 돈까지 내면서 들을까? 장담컨대 들을 것이다. 지금 듣는 대부분 지역 방송은 미리 녹음된 재료를 느슨하고 따분하게 편성해 개성이라곤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깨끗한 음질과 다양한 프로로 승부를 걸면 좋은 결과가 나올 공산이 크다. 앞으로 새로운 디지털 라디오의 성공 여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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