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이런 모습은 점점 더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그간 자신만의 오아시스였던 자동차의 오붓한 공간을 즐겼던 사람들은 첨단 장비들로 침해당하는 것에 대해 미리 단단히 각오를 하는 게 좋다. 곧 조용한 오아시스를 뒤덮을 만한 낙타 무리가 쳐들어올 예정이니까.
한때 자동차에서 누릴 수 있었던 평화스러움과 사생활 보장은 처음에는 라디오로 인해, 그 다음에는 휴대폰으로 인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깨져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2003년쯤 되면 아늑한 요람 같던 자동차 공간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비단 라디오 뉴스와 전화만은 아닐 것이다. 그때쯤이면 대부분의 자동차에 무선 인터넷이 기본 장착돼 가뜩이나 번잡한 세상사에 인터넷까지 온종일 운전자를 얽어맬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통합’이다. 클래리온사를 비롯한 여러 업체는 2-3년 전부터 외부 자료에 접속할 수 있는 기존 자동차용 통신 오락 시스템을 팔아왔다. 그러나 질 높은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려면 아예 자동차를 처음 설계하는 단계에서부터 이런 시스템을 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 어떤 서비스가 제공되는지 한번 살펴보자. 서비스 내용은 항법, 긴급 수리, 뉴스, 오락, 업무, 보안 같은 몇 가지 범주로 세분된다. 이 중 상당수는 이미 독립형 제품형으로 시장에 선보였다. 아이들을 위해 뒷좌석에 설치하는 TV라든가 운전자를 위한 도로 안내 서비스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업계에서 텔레마틱스라고 부르는 통신 서비스와 기존의 차량용 전자제품이 결합되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서비스가 열린다. 가령 실시간 차량 네비게이션시스템은 교통 정보와 소통이 원활한 우회로를 안내함과 동시에 인터넷을 통해 아이가 보고 싶어하는 비디오를 얼마든지 다운받을 수 있다. 긴급 고장 서비스의 질도 획기적으로 개선될 전망이다. 서비스센터에서는 고장 차량에 내장된 GPS 수신기를 통해 차량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은 물론 차량 내부의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원격 진단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정비요원은 수리에 필요한 부품을 빠짐없이 싣고 정확한 장소에 나타날 것이다.
인터넷은 주요 뉴스와 주가, 경기 전적, 그 외 운전자가 사전에 지정해 둔 정보를 운전 중에 자동으로 제공할 것이다.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소프트웨어 덕분에 전자우편을 귀로 듣고 말로 답장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휴대폰으로 조카의 생일 선물로 줄 장난감이나 친구 결혼기념일에 줄 책 또한 웹사이트에서 주문할 수 있다. 물론 실속 있는 여행도 가능하다. 가까운 공원이나 주유소에서, 고급 이탈리아 식당에 관한 정보까지 척척 대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첨단 서비스를 즐길 수 있으려면 자동차에 여러 장치가 구비돼 있어야 한다. 교통정보 분석이나 식당 안내처럼 장소에 기반을 둔 서비스를 받으려면 GPS 수신기는 기본. 차안에 휴대폰이 필요한 것도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내장 안테나라야 수신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내장 휴대폰이라야 충돌 사고가 일어나도 자동으로 구조 요청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운전자의 계기반에 마련된 디스플레이에는 네비게이션 정보와 각종 서비스 버튼이 표시된다. 오디오와 비디오를 디스플레이로 전송하는 광대역 통신망도 빼놓을 수 없다.
GM의 온스타, 포드의 레스큐, 다임러 크라이슬러의 텔레 에이드를 장착한 차량은 내장 휴대폰과 GPS 수신기를 달고 한발 앞선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시스템들은 문제가 생기면 즉시 서비스센터의 요원에게 연락한다. 사고가 나거나 누군가가 차량 절도를 기도하면 자동으로 서비스센터에 연락이 간다.
온스타는 올 가을부터 음성 전자우편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2001년에 출시되는 모든 메르세데스 차량에는 텔레 에이드 서비스가 무상으로 1년간 제공되고 모든 2001년형 캐딜락에는 온스타 서비스가 1년간 무상으로 제공된다. 온스타는 사브 9-5와 9-3에도 기본으로 장착되며 뷰익, 시보레, GMC, 올즈모빌, 폰티악에서 나온 모델을 비롯하여 많은 GM 차량에서도 옵션으로 제공된다. 앞으로 몇 년 안에 다른 자동차제조사들도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운전자를 위한 이런 기능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차량은 아직 그리 많진 않다. 현재 메르세데스는 일부 모델에서만 2,035달러에 옵션으로 제공되는 커맨드 네비게이션 시스템을 장착한 2001년형 모델에 대해 인포 서비스를 제공한다. 연회비 125달러를 내면 인포 서비스를 통해 뉴스, 경기 전적, 금융 정보, 날씨, 연예 정보를 버튼 하나만 누르면 금방 볼 수 있다.
메르세데스는 올해 말까지 전자우편도 전송할 예정이라 한다. 여름부터 2001년형 드빌과 셰빌 모델에 제공할 인포테인먼트 패키지에는 인터넷, 전자우편, 항법, 디스플레이가 장착된다. 검색을 하려면 화면을 보아야 하지만 전자우편은 음성으로도 받을 수 있다. 캐딜락 시스템은 운전자의 전자우편을 읽어주고 음성 명령을 인식해 다음 메시지를 읽어준다. 답장은 아직은 ‘네’, ‘아니오’ 또는 “나중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같은 간단한 답변만 할 수 있지만 캐딜락은 운전자의 말을 문자로 변환하는 음성인식 시스템을 조만간 도입할 예정이다. 목소리로 녹음한 내용을 오디오 파일로 저장하여 전자우편에 첨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BMW는 5, 7 시리즈에 대해 정보오락 시스템을 캐딜락처럼 옵션으로 제공할 예정인데, 유럽에서는 올해 말부터, 미국에서는 내년부터 제공한다. 아이드라이브라고 불리는 이 시스템에는 촉각에 반응하는 마우스 같은 손잡이가 달려 있어 통신, 네비게이션, 날씨, 연예 정보를 신속하게 입수할 수 있다.아이드라이브 같은 정보오락 시스템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종류가 많아지고 특히 오디오와 비디오의 비중이 커지면서 차량 안에서 쓰이는 고속 데이터 네트워크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BMW는 MOST(미디어지향시스템전송)라고 불리는 광섬유 네트워크를 도입했다. MOST는 지금도 초당 22.5Mb의 전송속도를 자랑하지만 조만간 150Mb로 한층 빨라질 것이다. MOST는 외부에서 받아들인 영화, 교통정보 같은 정보를 뒷좌석의 화면이나 항법시스템 같은 차량 전자기기로 배달하는 운반원의 역할을 한다. MOST는 또 엔진, ABS, 타이어 압력계, 기타 차량 시스템으로부터 정보를 받아 운전자에게 알려주고 원격 진단에 필요한 자료를 서비스센터로 보낸다. 이 데이터는 별도의 LIN(국지적 상호연결망)이라는 저속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된다.
자동차업계는 전자회사들이 확장 슬롯에 꽂기만 하면 어떤 차종에서나 쓸 수 있는 새로운 차량용 오락, 통신장비를 개발할 수 있도록 이 두 네트워크의 표준화를 서두르고 있다. 표준안은 2가지 방안으로 집약된다. 유럽은 LIN과 MOST가 지배적이고 미국은 저속 IDB-C와 고속 IDB-1394를 선호한다.
중요한 것은 차 안에 어떤 네트워크를 쓰든 상관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운영체제가 다르면 성능에서 차이가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운영체제로 부상하는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차량용 윈도 CE와 QNX 소프트웨어 시스템즈의 QNX 뉴트리노다. 여러 개의 운영체제가 공존하면 윈도 아니면 맥 운영체제에서만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듯이, 차량의 종류에 관계없이 운영체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구속당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몇 가지 있다. 먼저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를 웹 브라우저 안에서 작동하도록 개발하는 방법이다. 현재 맥, 윈도, 리눅스, 비(Be) 같은 운영체제를 위한 브라우저가 나와 있고 이 중 어느 것으로든지 웹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선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자바 소프트웨어 기술을 이용하는 방안이다. 자바를 차량, PDA, 데스크탑 컴퓨터 등에 쓰이는 운영체제의 번역도구로 쓰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데스크탑 컴퓨터로 검색한 식당 안내 정보를 PDA로도, 차량에 내장된 정보오락시스템으로도 검색할 수 있다. 같은 정보를 해당 기기에 맞게 살짝 변형시켜주는 조정 역할을 자바가 맡는 것이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콧 맥닐리 사장은 앞으로 운전자 서비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실현만 된다면 자동차는 굴러다니는 자바 브라우저가 될 것은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대폰 같은 방식으로 자동차가 판매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렇게 되면 가입비를 매달 꼬박꼬박 내는 대신 아주 저렴한 가격에 자동차를 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휴대폰에도 서비스의 종류가 여러 가지이듯 자동차 또한 기본적 접속만 선택하면 모델에 따라 불과 수백 달러로 새 자동차를 뽑을 수 있다. 아니면 주행 거리 당 얼마씩 요금을 책정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여기다가 자동차 보험료, 관리비, 긴급 고장 수리, 보안, 데이터, 음성, 그 밖의 서비스 이용료를 더하면 맥닐리의 예측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2천 달러만 내면 포르쉐 복스터를 굴릴 수 있다고 즐거워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런 서비스가 운전자의 주의를 얼마나 산만하게 만드는지 현실적인 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견에서는 이러한 장비 때문에 운전자의 집중력 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런 사정을 감안, GM은 앞으로 3년에 걸쳐 주의력 결여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실시할 예정이다. 정부가 개입하여 정보오락 시스템의 운영을 규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에서 그 옛날의 평온한 오아시스를 되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반면, 미래 자동차가 실시간 교통정보, 전자우편, 주가, 기타 서비스를 제공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디지털 고속도로를 달리는 메르세데스
화창한 햇살이 비치는 오전 나절, 포도주처럼 붉은 362마력 5,800cc의 12기통 메르세데스 CL600을 운전하는 기분은 가히 환상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96km까지의 가속시간이 5.9초에 불과하다는 놀라운 가속 성능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다. 정보 고속도로에서 얼마나 빠른 속도를 내는지 알아보는 게 목적이다. 연회비 125달러를 내고 메르세데스의 텔레 에이드에 가입하면 패키지로 제공되는 인포 서비스의 질이 지금은 엔진의 성능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커맨드 시스템은 통신과 오락 시스템의 중추 신경이다. 자동차를 주행하면서 인포 서비스를 작동시킨다. SVC 버튼을 누르고 이어 뉴스, 날씨, 주가 정보를 요청하기 위해 손잡이를 꾹 누르면 차량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해 데이터를 가져온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데이터를 가져오는 것은 집에 있는 PC다. 몇 분 뒤 ‘삐’하는 신호음이 울린다.
“지금 뉴스를 읽으시겠습니까?” 시스템이 질문을 던진다. “예” 를 누르면 손잡이를 돌려서 뉴스를 검색할 수 있다. 차안에서 뉴스를 보는 사람은 비운전자에게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정보 인출에 필요한 동작은 라디오 채널을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하다. 자동차 안에서 정보를 즐기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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