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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로 위장된 병원 타살사건

브라이언 앤드레센이 실험실에 있는 냉장고로 돌아서서 물약병들로 가득찬 플렉시글래스(Plexiglas) 보관함을 꺼낸다. 각 물약병에는 심장, 간, 지라와 다른 인체 기관들로부터 추출한 조직들이 들어 있다. 20개의 보관함에는 시체 한 구당 보관함 한 개 꼴로 조직 샘플들이 들어 있다. 키가 크고 목소리가 부드러운 이 화학자는 등을 구부린 채 실험실 노트북 안쪽에 든 차트를 가리킨다. “이 환자의 경우 근육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어요”라며 그가 십자(+) 표시를 지적하듯 말한다. 이 말은 냉장고의 다른 약병들처럼 근육 조직 샘플이 든 이 약병에도 독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이 샘플들은 모두 연쇄살인의 증거물들이다.

연쇄살인의 증거물

이 증거물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한 시간 가량 거리의 내륙 지역에 있는 비밀 연구시설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법과학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앤드레센이 설립한 후 은퇴한 뒤에도 정기적으로 컨설팅을 해주고 있는 이곳은 외부 용역을 받는 최고의 법과학 연구소이다. 이곳에 근무하는 과학자들은 환자들을 살해해 온 혐의를 받고 있는 병원 직원처럼 다른 기관들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들을 맡는다.

호흡기 치료사인 에프렌 살디바는 현재 앤드레센의 냉장고 안에 든 증거물로 입증된 6건의 살인으로 수감되어 있지만 지금까지 수년간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서 경찰의 추적을 따돌려 왔었다. 처음에 그는 수십명의 환자들을 살해했다고 자백했지만 환자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모든 살인이 자연사처럼 보이도록 계획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는 모두 꾸며낸 얘기라고 말을 바꿨다. 물적 증거나 살해된 환자들의 이름도 모르는 경찰은 어떤 말이 진짜인지 몰라 당혹스러워 했다.

병원에서의 살인 사건은 입증하기가 어렵기로 유명하다. “엄청나게 많은 환자들이 병원에서 죽습니다. 이들 중 누가 살해됐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앤드레센이 묻는다. 병원에서 발생한 사체는 보통 의학 검시관이 부검하지 않지만 살디바와 같은 병원 직원이 사용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비 마약성 진통제에 대해서는 표준 독극물 테스트를 실시하지 않는다.

“이런 사건을 다룰 만한 실험실은 흔치 않습니다”라고 살디바 사건 수사팀을 지휘했던 전직 경찰 경사 출신의 존 맥킬롭이 말한다. “우리는 거의 맨손으로 수사를 해야 했습니다.” 맥킬롭은 도움을 얻으려고 몇몇 전문가와 접촉을 했지만 모두들 앤드레센을 언급했다. 살디바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환자들을 살해했다고 은연중에 내비친 적이 있었다. 앤드레센은 맥킬롭에게 살디바가 사용했다고 한 독약들 중 최소한 파블론만은 희생자들에게서 추출해 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파블론은 팬큐로니엄 브로마이드라는 근이완제의 제품명으로 독화살에 바르는 남미 포도넝쿨 추출물 큐라레의 효과를 모방한 합성 스테로이드제이다. 미량만으로도 파블론은 효과가 뛰어나다. 예를 들어 의사들은 이 약물을 이용해 환자의 구역질을 방지하면서 호흡관을 삽입할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조금만 더 투여하면 환자가 사망한다. “아마 끔찍한 죽음이 될 겁니다”라고 앤드레센은 말한다. “이 약물을 투여하면 근육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폐가 작동을 멈춰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사체가 발견되어도 자연사한 것처럼 보인다.

여인사체내 독극물 분석

앤드레센 같은 화학자들이 파블론을 구입하려면 미 마약단속청이 발급하는 면허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병원 직원들은 카트나 선반에서 쉽게 이 약을 구할 수 있다. 병원 관리자들을 직원들이 레크리에이션용으로 훔칠 만한 약물들을 눈여겨 감시한다. 하지만 파블론 같은 약물들은 치명적인데도 불구하고 감시가 소홀하다.

전문가들은 파블론이 “죽음의 천사들”인 병원 살해범들이 즐겨 사용하는 서너 가지 약물들 중 하나라고 입을 모은다. 구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블론 중독은 밝혀내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앤드레센이 이 사건 조사를 맡기로 했을 때 파블론은 살아있는 자원자들만을 대상으로 표준 혈액 및 소변 검사를 통해 연구되었었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희생자들에게서 이 약물을 탐지해내려면 먼저 살해됐음을 입증하고 사체 발굴 동의를 받아 부패된 조직에서 이 약물을 검출해야 하는 수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

앤드레센에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자신의 실험 결과가 단순히 사체의 매장 방식이나 부패 과정만을 밝히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이 실험 기법을 완성하느라 돼지 간을 가지고 오랫동안 씨름했어요”라며 앤드레센은 가게에 갈 시간도 없이 매일 16시간씩 일하던 때를 회상하며 말한다. “밤늦게 대형 마트에 가곤 했는데, 저한테서 시체 냄새가 났던지 사람들이 슬슬 피해주더라고요.”



앤드레센은 원래 인체 조직에 남아있는 화학 무기 잔류물 탐지용으로 개발된 폴리스티렌 디바이닐 벤젠을 이용해 돼지 간으로부터 파뷸론을 추출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 폴리머는 무기 탐지기로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지만 조직으로부터의 파뷸론 추출 능력은 뛰어났다. 일단 추출 기법을 완성하자 앤드레센은 발굴한 병원 환자 사체의 기관들은 물론 관 주변의 토양과 사체 방부 처리에 사용된 모든 약물들을 테스트했다.

이런 철저한 검증 과정이 없으면 독극물 검사 결과가 잘못 나올 수도 있다. 플로리다의 한 사건에서 경찰은 7년 전 매장된 한 여인의 사체내 독극물 분석을 사설 연구실에 의뢰했다. 펜실베니아 국립의료원의 수석 과학자인 케빈 발라드는 이 여성의 방부 처리된 조직에서 탈분극성근이완제인 썩씨닐모노콜린을 발견했다. 썩씨닐모노콜린은 파뷸론과 효과가 유사한 썩씨닐콜린이 분해되어 형성된다.

이를 증거로 죽은 여인의 남편이던 빌 시버스는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후 플로리다 제1항소 지방법원은 이 판결을 번복하면서 발라드의 실험실에서 썩씨닐모노콜린이 방부 처리나 부패의 결과로 형성된 것인지 입증하는 테스트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환자이송도중 살해 의심

멸 달 후 국립의료원은 법원에 썩씨닐콜린 테스트는 신뢰도가 낮다고 조언을 했지만 시버스에게는 이미 늦은 조치였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폐암에 걸려 1급 살인죄에서 과실치사로 형이 경감돼 이미 형기를 마친 상태였다.

살디바 사건에서 앤드레센은 발굴된 사체에서 추출한 물질이 파뷸론임을 입증하는 데 두 가지 기법을 사용했다. 그는 먼저 약물 분해로 발생하는 부산물 탐지 장치인 기체 크로마토그래피-질량분석기로 샘플들에서 독극물을 분리했다.

이 분리 테스트 결과 확인을 위해 그는 리버모어 법과학 연구소의 동료 화학자인 아만도 알카레즈와 팀을 구성했다. 알카레즈는 고성능 액체 크로마토크래피를 장착한 3단계 4중극자형 질량분석기에 샘플들을 통과시켰다. 가슴 높이로 50만 달러짜리인 이 장비는 분자의 화학적 특성을 정확하게 밝혀낸다. 이 두 번째 테스트 결과 파뷸론과 분해 물질이 모두 샘플 조직에서 발견되었다.

이 조사 결과로 살디바는 새로운 자백을 했고, 파뷸론이 사용됐을 살인사건들을 조사중인 다른 독극물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앤드레센은 살디바 사건을 조사중에 최초의 도움 요청을 받았다. “한밤중에 폴란드에서 전화가 왔었죠”라고 그가 회상한다. 그는 앰뷸런스 운전수들이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 도중 파뷸론을 이용해 살해한다고 의심하고 있는 병원 관리자들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불행하게도 범죄 수사관들이 조만간 앤드레센의 기법을 다시 한 번 사용하게 될 것 같다. 앨버타 에드몬톤의 수석 독극물학자인 그레이엄 존스는 살디바건 같은 병원 살해사건이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 10~12년간 일어난 사건만도 열두어 건 정도 기억이 나네요”라고 그가 말한다.

“앞으로 이런 사건들이 더 늘 겁니다”라고 앤드레센이 예측한다. 그는 병원들이 파뷸론 같은 약품을 좀 더 주의깊게 보관하고 제약회사들은 제품에 추적자를 첨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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