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공학기술로 인체에 유해한 전염성 세균이
새로운 암 치료제로 거듭난다.
지난 2월 UCLA 연구진은 생화학분야에서 거인족의 충돌에 비견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 즉 인류의 대재앙 중 하나인 HIV를 또 다른 재앙인 암의 추적물질로 변환시켰다는 것이다.
전이성 흑색종에 걸린 쥐의 실험 결과 HIV 변종 바이러스가 에이즈를 유발하지 않고 암세포에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거의 같은 시점에 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의 마요 클리닉(Mayo Clinic)에서는 홍역 바이러스를 대상으로 건강한 조직은 건드리지 않은 채 종양만 찾아내 파괴토록 조작한 후 이와 유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처럼 획기적인 성과가 연이어 발표된 것만 보더라도 바이러스요법분야의 활발한 동태를 짐작케 한다. 바이러스요법(virotherapy)이란 바이러스의 속성을 이용해 암세포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상당 경우 이를 격파하는 치료법을 말한다.
예비연구과정에서 이와 같은 바이러스 상당수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사실이 입증됨에 따라 현재 일부 대학 및 바이오테크 업체에서 바이러스요법의 임상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다소 극단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이러스를 이용해 암세포를 공격한다는 발상은 사실 오늘날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유전공학기술을 공략하고 있다. 1950년대에 과학자들은 일반 감기바이러스인 아데노바이러스가 자궁경부암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화학요법이 두각을 나타냄에 따라 이 연구는 도외시됐고 바이러스요법은 1991년 사이언스 지에 연구논문이 게재된 후에야 비로소 부활됐다. 이 논문을 통해 유전조작을 거친 바이러스가 질병을 유발하지 않고도 종양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소개됐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적합한 바이러스를 적정 위치에 놓는 것 다시 말해 적정 바이러스가 암세포를 침투해 복제하고 암세포를 죽인 후 점점 불어나 인근 암세포를 공격하게끔 악성 종양에 바이러스를 가져다 놓는 데에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체내의 면역체계로부터 어떤 반응도 유발해선 안 된다. 대체로 직접 주입 방식이 가장 손쉽긴 하지만 뇌와 같은 일부 신체부위의 경우 이 방식을 적용하기 어렵다. 인체에 무리를 주지 않고 전이된 암세포를 잡아낸다는 점에서 정맥주사를 사용하는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 방법은 체내의 면역체계를 자극해 목표지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거부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마요 클리닉의 분자의학 프로그램 책임자인 스티븐 러셀은 “면역체계야말로 바이러스요법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마요 클리닉의 최근 연구에서 사용한 유전자 조작 홍역 바이러스는 혈류를 통해 쥐에게 성공적으로 투약됐다. 이는 극소수에 불과한 성공사례 중 하나이다.
체내 면역체계의 거부반응을 피하기 위해 러셀 박사는 바이러스를 직접 종양으로 호송하게끔 항체를 표출하도록 홍역 바이러스의 게놈을 변형시킴으로써 “특수 목적용” 홍역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다. 이와 유사하게 UCLA 흑색종 연구에 사용된 HIV 변종 바이러스도 특정 목적용으로 제작됐으며 이후 연구진은 이 바이러스를 전립선암과 피부암 치료용으로 맞춤 개발했다. UCLA 에이즈 연구소의 어빈 S. Y. 첸 소장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바이러스에 각기 다른 갈고리를 달아 서로 다른 분자에 교착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신규개발작업이 유망하긴 하지만 바이러스요법이 의료계 현장에 투입되려면 앞으로도 수년은 기다려야 한다. 가령 첸 소장은 적어도 3년 내에는 임상실험을 시작하지 않을 생각이며 이미 테스트단계에 들어간 치료법들조차 수년간의 실험은 물론 FDA의 심사까지 거쳐야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재 이 분야가 시험기에 접어들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금후 몇 년간의 연구결과를 통해 악성 바이러스에 실제로 연구개발 가치가 있는지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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