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만해도 이 설화는 코미디의 소재로 활용되며 김선달을 사기꾼의 대명사로 만들었지만 극심한 환경오염 속에서 물을 사먹는 것이 당연시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봉이 김선달이 주는 교훈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아이디어와 마케팅 능력만 있다면 대동강 물을 파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시대도 아닌 2006년 현재에 봉이 김선달이 들었다면 울고갈 만한 사업이 매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활황을 누리고 있다. 무한자원이자 주인이 따로 없는 ‘공기’를 파는 산업용가스 산업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산업용가스 산업은 단순히 공기 자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력을 동원하여 산소(O2), 질소(N2), 아르곤(Ar) 등 공기에 함유되어 있는 특정 원소를 추출, 판매하기 때문에 사기성이 농후한 김선달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원료비가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대판 봉이 김선달 사업이라해도 지나친 억측은 아닌 셈이다.
연간 1조7천억원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산업용가스 산업에 대해 살펴보자.
원료는 ‘공기’…원료비 ‘0원’
지구의 대기를 감싸고 있는 공기의 주요성분은 질소 78.08%, 산소 20.95%, 아르곤 0.93%이며 헬륨(He), 네온(Ne), 크립톤(Kr), 제논(Xe), 암모니아(NH3), 일산화탄소(CO) 등의 가스들이 나머지 0.04%를 차지한다.
산업용가스 업체들은 공기분리장치(Air Separation Unit)라는 특수설비를 통해 공기중에서 이러한 성분들을 분리하여 상품화해냄으로서 원료비 ‘0원’이라는 꿈을 실현해냈다.
ASU는 압축된 공기를 원료로 냉각, 정제, 열교환, 증류, 분리 등의 공정을 거쳐 산업용가스를 생산해내는데 각 원소마다 어는점, 끓는점 등 물성(物性)이 다르다는 점을 활용하여 원하는 성분만을 정확히 추출해낸다.
일견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한 시스템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ASU 제조능력을 갖춘 업체들이 극소수에 불과할 만큼 ASU는 100년이상 이어진 최첨단 기술력이 집약되어 있는 장치이다.
지난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국내에 200여개 이상의 ASU가 설치·가동되고 있지만 국내기술로 제작된 경우는 단 2개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를 반증한다.
그렇다면 원료비가 ‘0원’인 산업용가스의 가격은 얼마이며 어떻게 정해질까?
국내 양대 산업용가스제조업체인 대성산업가스의 관계자는 “설비투자비를 제외하면 전기료, 인건비, 배송비가 가격책정의 핵심 고려사항으로 LPG가스통 크기의 산소통 1개의 소매가격이 약 1만원선”이라며 “공기중 함량이 적은 아르곤은 산소의 2배가 넘는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공기중에 0.00011% 밖에 없는 크립톤이나 0.000008%인 제논의 경우 순도(純度)에 따라 가스 1병당 1천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수소(H2)와 탄산(CO2), 암모니아 등은 화학적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ASU를 통해서는 생산하지 않으며 헬륨 또한 ASU 사용시 상업성이 없을 만큼 가격이 비싸져 대형 천연가스전의 상층부에 떠있는 자연상태의 헬륨을 포집하여 사용하고 있다.
‘반도체’에서 ‘과자’까지 활용도 무궁무진
국내에 산업용가스 시장이 본격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비료, 제철, 정유 등의 산업이 급속히 활성화되면서 부터.
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 산소, 질소, 아르곤으로 대변되는 산업용가스는 TFT-LCD, 반도체, 우주항공 등 첨단산업에서부터 조선, 철강, 석유화학, 식품, 음료, 화장품, 제약, 건설 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국가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원자재가 됐다.
사실상 볼펜, 라이타, 옷, 가방, 컴퓨터, 자동차 등 우리 주변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들이 산업용가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업용가스의 공급이 단 하루만 중단된다 해도 국가산업 전체가 완전히 마비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산소, 질소, 아르곤의 용도를 살펴보면 먼저 산소는 주로 우주왕복선 등 로켓의 추진연료, 용광로의 화력강화, 양식장 활어의 생명유지, 환자 및 스쿠버다이버들을 위한 호흡가스, 용접(절단), 반도체 제조(SiO₂막 생성) 등에 활용된다. 이중 우리나라에서는 철강업종에서 산소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데 국내최대 철강업체인 포스코는 산소를 얻기 위해 무려 20여기 이상의 대형 ASU를 자체 보유하고 있다.
질소의 경우에는 불이 붙지 않는 비(非)가연성가스, 다른 원자(또는 분자)와 화학반응하지 않는 불활성가스, 액화(液化)시켰을때 -196℃에 달하는 초저온가스라는 특성을 활용하여 산업적으로 사용된다. 난자·줄기세포·제대혈 등의 냉동보관시 액체질소가 쓰이는데 터미네이터2에서 악당 터미네이터를 얼려버렸던 것도 바로 액체질소였다.
액체질소는 또 토목공사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토양의 급속동결에도 사용되며 항공기와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사용되는 타이어에는 펑크방지를 위해 공기 대신 질소가스를 주입하는 것이 철칙이다.
특히 수년전부터는 제과업체들이 과자봉지에 질소가스를 채워 넣고 있는데 과자의 기름성분이 공기중의 산소와 반응해 눅눅해 지는 것을 막고 외부충격에서도 보호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제공한다. 같은 이유로 박물관에서 고가의 미술품이나 유물들의 훼손방지를 위해 유리상자 속에 넣을 때도 내부에 질소가스가 주입된다.
한편 아르곤은 산소, 헬륨 등과 혼합하여 자동차 에어백용 가스로 사용되고 있으며 형광등, 백열등 등 전구의 내부, 이중으로된 유리창의 내부에 주입되어 수명과 강도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양철승 기자 csya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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