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과 추수의 신(神) ‘바쿠스’(Bacchus). 바쿠스가 수 천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 한국에서 또 하나의 신화로 탄생했다.
동아제약이 출시한지 올해로 46년째를 맞는 한국인의 피로회복제 ‘박카스’는 지난 2005년 말까지 약 152억4,000만병이 팔려나갔다. 그 동안 팔린 박카스 병을 한 줄로 세우면 지구를 45바퀴나 돌 수 있다.
동아제약 천안공장의 박카스 생산라인에서는 1분 당 2,400개의 박카스가 생산되는데, 이 속도는 기관총 발사 속도의 4배에 이른다.
생산 자동화를 통해 단시간 내 생산이 이뤄지지만 한 병의 박카스가 생산되기까지 무려 30여 가지 공정과 품질검사가 뒤따른다.
사회가 급속히 변화하고, 제품의 라이프 싸이클이 급속히 빨라지는 시장상황에서도 박카스는 45년이 넘게 국내에서 많이 팔리는 의약품 1위, 한국인의 자양강장 드링크제의 지존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으니 신화로 불릴만하다.
출시된 지 반세기가 가까워오고 있음에도 박카스는 여전히 동아제약 전체 매출의 35% 전후를 차지, 장수 신화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1960년대 당시의약품은 회사 이름이나 성분을 이용해 제품명을 짓는 것이 고작이던 시대에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을 붙이는 파격적인 브랜드로 탄생한 박카스는 이미 신화의 주인공으로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카스 개발의 장본인은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이다. 60년대만 해도 한국인들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데다 술과 과로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당시에는 비타민제가 유행이었지만 강 회장은 이 같은 국민 영양상태를 고려해 간 기능 강화효과가 있는 타우린 성분에 비타민 등을 섞어 새로운 개념의 의약품을 내놓았다.
박카스가 숱한 아류 제품들의 도전을 이겨내고 45년간 의약품 판매 1위를 자켜낼수 있었던 것은 검증된 약효와 기술력 때문이다.
박카스라는 이름도 그의 작품이다. 강 회장은 유학 시절 독일 함부르크 시청 앞에서 보았던 바쿠스 동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술로부터 간장을 보호한다’는 의미의 제품 이름을 지었다.
처음 출시된 1961년 알약 형태로 선보인 박카스는 음주 전후 ‘박카스를 복용하면 간 손상을 줄일 수 있다’는 컨셉트로 어필해 몇 개월 만에 월 매출 1만개를 돌파하는 등 시장에 안착하는 듯 했다. 하지만 기술 부족으로 정제 표면의 당의가 녹아 내리면서 대량 반품 사태가 발생, 위기를 맞았다.
이어 20㏄ 앰플로 바꿔 ‘박카스 내복액’을 재 발매했지만 용기로 인한 안전사고, 운반과정 중 파손사고 등으로 박카스의 이미지는 계속 손상되기만 했다.
불운이 이어졌지만 강 회장은 제품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1963년 새로 내놓은 제품이 드링크 형태의 ‘박카스-D(drink)’. 동아제약은 사운을 걸고 ‘3M 전략’(대량생산, 대량광고, 대량판매)을 펼쳤다.
박카스는 당시 광고도 제품 이름만큼 파격적이었다. 의사ㆍ약사를 대상으로 하는 전형적인 전문지 광고에서 벗어나 TV, 라디오, 신문, 잡지 등 모든 매체를 활용해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광고를 전개했다.
그런가 하면 도매상을 거쳐 소매 약국에 출하되던 의약품 유통 방식에서도 과감하게 탈피, 소매 직거래를 중심으로 하는 특약점 제도를 구축해 독특한 유통 시스템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같은 다양한 변화에 힘입어 발매 1년 만에 박카스-D는 드링크 시장 1위 자리에 올랐다.
지난 1991년 5월에는 성분을 보강시켜 ‘박카스-F’(Forte:강하다는 뜻의 포르테)로, 2005년 3월에는 타우린 성분을 2배(double) 보강했다는 의미의 ‘박카스-D’로 각각 업그레이드됐다.
하지만 장수 브랜드로 시장에서 살아남은 46년 여 동안 박카스도 승승장구하는 호시절만 보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박카스 신화를 깨뜨리기 위한 견제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실제 숱한 경쟁 제품들이 박카스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수 차례 반복해왔다. 그 가운데 광동제약의 비타민 음료인 ‘비타 500’은 쟁쟁한 라이벌 제품으로 꼽힌다.
비타500은 웰빙 열풍으로 비타민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새삼 높아지면서 박카스에 정면 도전했다. 비타500의 도전은 상당히 위협적이어서 한때 박카스의 아성이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박카스는 현재까지 드링크 시장 수성에 성공, 지난 수 십년 간 쌓아온 저력을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박카스가 장수 상품으로 전국민의 사랑을 받게 된 데는 광고 전략도 한몫 했다. 제품의 약효를 부각시키기 보다는 누구나 쉽게 공감할만한 공익 광고 같은 내용으로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 잔잔하게 파고든 전략이 주효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캠페인 광고, 증언식 광고, 스폰서형 광고 등 박카스가 새롭게 시도한 광고 전략은 지금까지 한국 광고사에 이정표로 남아 있을 정도.
‘박카스 40년-그 신화와 광고이야기’의 저자인 신인섭 교수는 “광고 없이는 박카스 신화는커녕 박카스라는 브랜드조차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음지에서 묵묵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새 한국인’ 시리즈 광고는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더 한층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버스 종점에서 졸고 있는 학생에게 박카스를 건네주는 버스 기사, 환경 미화원인 아버지의 손수레를 미는 대학생 아들 등을 소재로 한 광고는 ‘그날의 피로는 그날 푼다’는 광고 카피와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최근에는 누구나 경험해봤을 법한 일상 생활 속 소재를 채택한 리얼리티 광고로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갑자기 휴대폰 카메라로 ‘셀카’를 찍는다. 박카스를 얼굴에 대고 귀여운 표정으로.
아내의 사진은 야근하는 남편의 휴대폰으로 전송된다. ‘힘내! 나는 당신의 박카스’라는 메시지와 함께. ‘야근’ 편으로 불리는 이 광고는 소시민의 일상을 그려내 공감을 끌어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박카스의 이 같은 광고 전략은 30여종의 자양 강장 드링크제 가운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넘버원’ 브랜드로 유지해주는 일등 공신 역할을 해준다.
실제 모 기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박카스의 브랜드 인지도는 전체 브랜드 평균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준으로 나타나 수 백만 명의 충성 고객들이 반복구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박카스가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사랑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카스의 검증된 약효와 기술력을 빠뜨릴 수 없다.
많은 한국인들이 박카스를 음료처럼 마시고 있지만 박카스는 어디까지나 의약품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
숙취로부터 간을 보호해주고 피로 회복 등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계속해서 찾는다는 얘기다.
박카스의 주요 성분인 타우린이 개발 당시만 해도 간에 좋은 성분 정도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연구 결과 심장 기능 강화, 콜레스테롤 저하, 뇌 세포 보호 등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어 동아제약 연구소에서는 박카스의 약효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진행중인 상태다.
동아제약의 한 관계자는 “박카스 판매에 힘입어 67년 이후 동아제약이 업계 1위 기업으로 부상한 이래 현재까지 그 자리를 유지해오고 있다”며 “현재 동아제약이 신약 개발 및 전문의약품 중심의 제약사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박카스가 힘이 원천이 돼 온 것이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동아제약은 박카스를 발판으로 삼아 세계 시장으로 뻗어 나가겠다는 장기 성장 플랜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지난 45년간 국내 시장에서 한국인의 피로 회복제로 장수했다면 이제 세계 속의 박카스로 살아 남기 위한 수출 드라이브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
현재 박카스가 수출되고 있는 국가는 미국, 필리핀, 중국, 브라질, 이란 등 20여개 국이 넘는다. 이에 따라 동아제약은 지난 2006년 2,000만병에 머물렀던 박카스의 수출 물량을 현지화 작업을 통해 2009년까지 현재의 5배인 1억병으로 늘릴 계획이다.
그 동안 주로 교민을 대상으로 해오던 영업도 현지인을 대상으로 확대하는 한편, 한국문화 탐방, 한류 스타 콘서트 현지 개최 등을 통해 박카스의 현지화에 주력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미국, 필리핀, 중국 등지에서 제품 포장부터 광고까지 제품 판매를 위한 모든 마케팅 활동을 현지화 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또한 현지에서 실적이 좋지 않은 마케팅ㆍ유통업체는 관계를 정리하는 대신 실력이 입증된 마케팅ㆍ유통 전문업체와 계약을 체결해 ‘현지인들 건강에 좋은 음료’라는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동아제약 관계자는 “교민이 아닌 현지인을 대상으로 마케팅 활동을 강화해 나감으로써 박카스가 한국인의 건강음료가 아닌 세계인의 건강음료로 자리잡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박카스는 이제 한국인의 사랑을 넘어 세계시장에서 새로운 신화 창조에 도전하기 위해 대장정에 나서고 있다.
이효영 서울경제 기자 hylee@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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