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 비판자로 주목받아온 그의 사인은 소량만으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치명적인 방사능 물질 ‘폴로늄-210’에 의한 중독.
그는 입원 직후 “크렘린이 눈에 가시인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 방사능에 중독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방사능 물질 근처에는 가본적도 없는 그가 현직 FSB 요원들과 함께 차를 마신 직후 폴로늄-210에 중독됐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는 이 같은 암살 지시를 강력히 부인했고 증거가 발견되지도 않았지만 전 세계는 이번 사건이 첨단과학기술을 동원해 목표물을 완벽히 제거할 수 있는 21세기형 암살자 시대의 본격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구소련 시절 보유하고 있었던 막대한 양의 핵물질 및 생화학 물질들이 매년 사라지고 있다는 점도 암살범과 테러범들의 활동영역을 넓히는 요인으로 지적되며 세인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난해 11월 17일 런던 중부의 유니버시티 컬리지 병원(UCH) 중환자실에 한 환자가 입원했다. 알렉산더 리트비넨코라는 이름의 이 환자는 입원 당시 신체적으로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정신만큼은 온전했다.
그는 지난 2주간 극심한 설사와 구토에 시달려왔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주요 장기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사들은 치료와 검사를 병행하며 식중독이나 장염과 같은 일상적인 질병이 아님을 직시했지만 정확한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다. 외관상 심각한 방사능 중독 증상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까지 어떠한 방사능도 쏘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UCH의 중환자실 임상과장인 게오프 벨링건 박사는 “분명 방사능 중독이었지만 방사능 측정기의 게이지는 음성을 가리켰다”며 “정확한 진단이 불가능했다”고 회상한다.
의사들이 증상 규명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리트비넨코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는 크렘린이 자신의 암살을 지시했고, 러시아연방보안국(FSB) 요원들의 작전을 통해 방사능에 중독됐음을 확신했다.
실제로 리트비넨코는 KGB의 후속기관인 FSB의 장교를 지낸 전직 스파이로서 지난 2000년 영국으로 망명한 후 FSB의 비밀작전을 폭로하는 등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공개적 비판자로서 크렘린과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일상적인 중증질병 환자 한명이 추가됐던 것에 불과했던 이 사건은 곧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의 과학자들은 전 국민의 건강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리트비넨코는 크렘린이 자신은 물론 러시아 정권의 반대자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하려 한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리트비넨코의 죽음과 크렘린의 암살지시 부인으로 진실은 미궁 속에 빠질 확률이 높아졌지만 이번 사건은 미래의 암살자들이 첨단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끔찍한 무기를 들고 인명을 살상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단적인 예다.
반체제 인사의 죽음
90년대 후반 리트비넨코는 FSB의 조직범죄 부서에 배속됐다. 그의 업무는 구소련 연방의 붕괴 이후 자유시장경제로 전환 중인 혼란한 국가 상황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의 척결이었다.
하지만 그는 머지않아 부패한 FSB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고, 급기야 지난 98년에는 스키마스크를 뒤집어 쓴 반체제 인사 몇 명과 함께 “FSB의 상사가 제주머니 챙기기에 급급하고 있으며 부적절한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 같은 이유로 푸틴과 틀어진 그는 결국 지난 2000년 러시아를 탈출, 많은 반체제·반정부 인사들이 망명지로 선택하는 영국의 런던으로 갔다.
하지만 이후에도 리트비넨코는 폭로를 계속했고, 이로 인해 예전 FSB 동료들의 반감도 높아져 갔다.
일례로 그는 자신이 저술한 한 책에서 “지난 99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일련의 아파트 폭파사건들은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소행이 아니며 FSB의 자작극에 불과하다”고 폭로했다.
당시 러시아는 체첸 분리주의자를 범인으로 공식 발표했고, 이후 벌어진 체첸 침공을 정당화하는 방패막이로 사용한바 있다.
리트비넨코는 또 지난 2006년에는 러시아 출신의 언론인이자 푸틴에 대한 대표적 비판자 중 한명인 안나 폴리코브스카야 기자의 살해사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FSB와 크렘린이 그의 계속된 돌출행동에 자극을 받은 것은 당연지사. 올해 2월 리트비넨코의 FSB 상관이었던 알렉산더 구삭은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리트비넨코가 영국 당국에 러시아 비밀요원들의 신분을 노출시켰다”며 “반역죄를 사형으로 다스렸던 구소련 시대에 그가 고국으로 귀국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리트비넨코 또한 지난해 러시아 의회가 ‘테러나 극렬행위로 크렘린에 의해 기소 당한 개인들은 러시아 밖에서도 제거할 수 있다’는 내용의 새로운 법을 제정한 이래 생명에 커다란 위협을 느껴왔다.
결국 그가 천수를 다하지 못했음을 볼 때 이러한 두려움은 단순한 노파심이 아니었음이 확인된 셈이다.
그에게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는 지난해 11월 1일 경 지금은 사업가로 변신한 전직 러시아 군·정보기관 요원들인 드미트리 코브턴, 안드레이 루고보이, 비야체슬라프 소코렌코 등 3명을 런던 밀레니엄 호텔에서 만나면서 시작됐다.
리트비넨코는 이들과 차를 함께 마셨는데 바로 그날 밤부터 구토와 설사,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이틀 뒤 런던 북부의 바넷종합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들은 어떠한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고, 같은 달 17일 그를 UCH로 이송했다.
하지만 의사들이 원인 찾기에 우왕좌왕하는 동안 그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됐다.
간, 신장, 비장 등 주요 장기들이 하나씩 망가지기 시작했으며 백혈구 수치가 급감하면서 면역체계도 붕괴됐다.
급기야 11월 22일에는 기도에 관을 삽입하고 인공호흡장치의 도움을 받아야 호흡이 가능한 상황이 됐지만 그때까지도 의사들은 그가 어떤 병에 걸린 것인지 알지 못했다.
초기에 의심했던 방사성 탈륨(TI)은 이미 원인에서 배제된 상태였고, 방사능 측정기 검사에서도 감마선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았다.
UCH의 게오프 벨링건 박사는 “감마선 중독 가능성이 배제되자 세포 중독을 일으킬만한 모든 약품들에 대한 조사에 돌입했다”며 “하지만 신속히 정체를 밝혀내기에는 의심이 가는 약물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고 말했다.
사실 리트비넨코의 증상은 일개 병원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생소한 난제였다. 이에 UCH는 그의 소변 샘플을 채취, 영국 원자력무기연구소(AWE)에 보냈고, 그곳의 연구자들에 의해 ‘알파 방사능’ 감염 징후가 포착됐다.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알파 방사선 방출 물질은 ‘폴로늄-210’이라는 동위 원소로서 산업적으로는 정전기 방지장치의 제조에 쓰인다.
AWE는 즉시 이 폴로늄-210을 핵심 용의선상에 올리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환자를 치료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AWE가 폴로늄-210이 원인임을 확신한 것은 11월 23일 오후 6시경. 그러나 이 소식이 병원에 전달되기도 전에 이날 9시 21분 환자의 심장은 멎었다. 자신이 무엇에 중독된 것인지도 모른 채 삶을 마감한 것.
리트비넨코의 사망 당일 당직 의사였던 짐 다운 박사는 “그는 급격히 혈색을 잃었고 심장은 쇠약해져만 갔다”며 “갑자기 혈압이 0으로 떨어지면서 숨을 거뒀다”고 설명했다.
내장기관의 터미네이터
핵물리학자들은 폴로늄을 ‘터미네이터(terminator, 종결자)’라고 부른다. 강력한 독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느린 중성자 포착(slow neutron capture)’이라는 공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생성되는 원소이기 때문이다.
이 물질은 지구의 지각에서 우라늄-238이 붕괴(decay)할 때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데, 평범한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1년 동안 노출되는 방사능의 약 1%가 폴로늄이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양을 모으면 은회색 가루처럼 보인다.
인위적으로는 핵원자로 내에서 ‘비스무스-209’ 원소를 중성자들과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폴로늄-210을 만들 수 있다. 매년 100g 정도만이 생산되는데, 대부분 러시아가 그 출처다.
폴로늄-210의 특징은 여타 방사능 물질과는 달리 인체 외부에 있을 때는 전혀 해롭지 않다는 것. 하지만 인체 내부로 유입됐을 때는 탈륨과 같은 방사성 원소들이 내뿜는 감마 방사선에 비해 20배나 치명적 피해를 일으키는 알파 방사능이 방출된다.
또한 쇠와 콘크리트까지 투과하는 감마선과 달리 알파 입자들은 종이 한 장이나 살갗조차도 통과하지 못하지만 알파 방사능 물질을 삼키거나 호흡기로 들이킬 경우, 또는 외부 상처를 통해 혈관 속으로 침투될 경우에는 인체 내 모든 세포분자들이 터져버린다. 마치 작은 핵폭탄이 몸속에서 터지는 격이다.
런던에 위치한 서레이 대학의 핵물리학 강사인 패디 리건 박사는 “폴로늄-210의 인체 유입은 마치 자루에 담긴 탁구공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과도 같다”며 “인체의 내장 안쪽에 알파 입자를 바르면 이 입자와 접촉하는 모든 세포들이 사멸된다”고 설명했다.
폴로늄의 파괴력을 감안할 때 리트비넨코에게 투입된 폴로늄은 옷핀의 머리 부분 정도에 해당하는 극미량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성인 1명의 생명을 앗아가기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약 1~10 기가 베크렐(GBq)에 해당한다.
1 베크렐은 한 개의 알파 입자가 1초당 방출하는 방사능의 양으로서 전문가들의 추측대로 최대 10 기가 베크렐이 투입됐다면 초당 100억개의 알파 입자들이 방사능을 방출했음을 의미한다. 이 정도면 실로 엄청난 양이기 때문에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리트비넨코의 몸속으로 들어간 폴로늄-210은 위장에서부터 혈관으로 스며들어 몸 전체로 확산됐을 것이다. 초기에는 머리카락, 피부, 위(胃), 골수 등과 같은 분열세포들이 표적이 돼 급격히 파괴됐을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든 리트비넨코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폴로늄-210에 노출된 인물이자 이에 의해 살해된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되게 됐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리트비넨코의 폴로늄-210 중독 장소가 지난해 11월 1일 러시아 비즈니스맨 3명과 미팅을 가졌던 밀레니엄 호텔임을 확신하고 있다. 미팅 도중 누군가가 그의 차(茶)에 폴로늄을 넣었다는 것이다.
물론 러시아인들은 리트비넨코의 죽음이 자신들과 전혀 무관함을 주장하고 있지만 미팅 이전에 방사능 물질과 접촉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핵심 용의자로서 살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미팅 전날인 10월 31일 그들이 돌아다닌 장소들에서 방사능 흔적이 검출된 것.
이처럼 런던 전역에서 알파 방사능이 검출된 것은 리트비넨코를 독살한 사람이 일반인들에게도 충분한 위협이 됨을 잘 나타낸다. 주변에 있다가 우연히 폴로늄을 흡입하게 되더라도 사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호텔 내 여러 장소와 몇몇 식기들에서 매우 높은 수치의 폴로늄 210이 감지됐으며, 남성용 화장실의 문은 오염도가 너무 심한 탓에 보건부에서 떼어내어 핵폐기물로 처분하기도 했다.
또한 리트비넨코의 집과 사무실은 물론 그가 탑승했던 비행기와 택시 좌석들도 폴로늄-210에 오염돼 있었다.
범인으로 지목된 소코렌코가 축구경기를 관람했던 에미리츠 스타디움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런던의 일부 호텔 방들은 폴로늄 수치가 높아 예약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만약 이번 암살의 목적이 다른 반체제 인사들에게 중엄한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암살범들이 무기를 잘 고른 셈이다.
폴로늄-210은 대량 살상의 위험 없이 ‘핵 공격’을 가할 수 있어 사회에 극도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1월 23일 폴로늄의 정체가 처음 정부 당국에 감지된 이후 영국 보건국은 약 40곳 이상을 모니터링 했으며, 이중 최소한 20개소에서 높은 오염도를 확인했다.
보건국은 약 700여명의 사람들에 대한 소변검사도 실시했는데, 현재까지 17명의 오염 수치가 높게 나타났다.
사회 전반에 가해졌던 강력한 두려움과는 달리 일반 대중들에게 가해진 위협은 별달리 없었다. 대량 살상무기로서의 폴로늄은 무용지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만약 폴로늄이 리트비넨코의 찻잔 속이 아니라 런던의 상수도에 뿌려졌더라면 곧 흩어져버려 아무도 중독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또 암살범들이 폴로늄 취급에 따른 자신들의 위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번 암살을 배후조종한 인물의 경우 어느 정도 이 무기를 정확히 연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잉글랜드 미들섹스 대학의 방사능학과 닉 프리스트 교수는 “리트비넨코에게 사용된 양의 폴로늄을 핵원자로에서 만들어 내려면 최소 며칠은 걸렸을 것”이라며 “폴로늄-210은 반감기가 138일에 불과해 4.5개월 만에 방사성 원소의 절반이 붕괴되기 때문에 암살자들은 이보다 훨씬 전에 작전을 계획한 후 신속하게 실행한 게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에 더해 “암살자들이 폴로늄을 선택했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정교한 준비를 했었음을 알 수 있다”며 “그들은 폴로늄이 감마선을 방출하지 않아 국경을 무사히 통과하리라는 것, 인체에 투여된 후에도 정체를 밝혀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총을 쏘거나 칼로 찌르는 등 다른 방법들도 많은데 굳이 암살자들이 자기 자신까지 오염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폴로늄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직 KGB 장군으로서 지금은 푸틴 정부를 비판하고 있는 알렉세이 콘다우로프 의원도 “암살의 진실이 발각되지 않는 길은 생소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 뿐”이라며 “하지만 암살기술 만큼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범행 은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KGB 특수임무국
사실상 러시아의 암살자들은 과거 구소련 시절부터 사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특이한 암살법의 개발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해왔다.
1930년대에 스탈린이 KGB에 설립한 ‘특수임무국(AST)’이 그 시초로서 이 기관의 산하에 있었던 카메라(Kamera)라는 의학부서의 임무가 바로 독특한 독소의 개발이었다.
AST의 특수임무란 주로 ‘인민의 적’을 납치?암살하는 것을 뜻했는데, 장소를 불문하고 전 세계에서 이루어졌다.
당시의 한 KGB 기록에는 ‘이 반역자들은 본인이 부재중인 상태에서 사형이 언도됐고 해외에서 그 형이 집행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카메라에서 방사능 물질은 최우선 순위의 암살용 무기였다. 실례로 1957년 경 전직 스파이에서 반체제 인사로 전향, 러시아를 탈출한 후 서방세계에 살고 있던 니콜라이 코클로프가 독일에서 열린 반소련 컨퍼런스에 참석했다가 누군가가 건네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기절했다.
당시에는 식중독이 의심됐지만 식중독으로 보기에는 이상한 병세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머리카락도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군병원 의사들에 의해 방사성 탈륨에 의한 감염이 밝혀지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는데, 크렘린이 자신의 암살을 배후 조종했다고 확신했다.
물론 다양한 정황 증거에도 불구하고 크렘린은 리트비넨코의 죽음과 러시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하고 있으며, 폴로늄이 러시아의 핵원자로에서 추출되었다고 해서 암살이 러시아의 소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각각의 핵원자로마다 소량의 폴로늄이 생산되고 있고, 이중 극소량이 사라진 것을 러시아가 몰랐을 개연성도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제너디 구드코프 의원도 이러한 생각에 의견을 같이한다. 그는 “리트비넨코 살해범들이 러시아 출신인 것은 확실하지만 이것이 드러난 증거의 전부”라며 “러시아 정부와 이번 사건을 연관 짓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결국 리트비넨코 살해 사건의 배후 조종자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사건은 러시아 정권이 과거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을 표출하고 있으며, 방사능 물질을 활용한 암살을 배후조종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전 세계에 각인시켜 줬다.
101 WAYS TO DIE 러시아 암살자들은 항상 특이한 방법을 선호한다.
● 1978년 불가리아 반체제 인사인 게오르기 마르코프가 런던 워털루 브리지 근처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중 한 남자가 다가와 우산으로 찌르고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며칠 후 사망한 마르코프를 부검한 의사들은 미세한 금속 파편들이 그의 허벅지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파편들은 우산 끝에서 주입된 것으로 생화학 무기에 사용되는 맹독성 물질 리신(ricin)을 함유하고 있었다.
● 1990년대의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는 사업가들이 암살자의 표적이 됐다. 모스크바의 기업가 이반 키벨리디는 1995년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숨졌다.
나중에 경찰은 화학무기에서 추출된 것으로 보이는 독성물질이 그의 전화기에 묻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 2000년 푸틴 집권 이후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암살이 다시 시작됐다. 2003년에는 언론인이자 의회 의원으로서 부정부패 사건을 조사 중이던 유리 쉐췌코치킨이 고열과 심한 구토 증상으로 입원한 후 2주 만에 사망했다.
살갗이 벗겨지기까지 했던 그의 죽음은 독살로 추정됐지만 입증은 되지 않았으며, 러시아 당국은 그의 의료기록을 기밀로 처리했다.
● 2004년 9월 푸틴의 신랄한 비판자였던 여성 언론인 안나 폴리트코브스카야는 비행기에 앉아 당시 초등학생 1,200명을 억류하고 있던 체첸 테러범들을 설득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비행 중 차를 한잔 마신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결국 그녀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2년 후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총을 맞고 사망했다.
세계화된 살인
구소련의 붕괴 이후 전 세계는 테러범들이 대량살상을 목적으로 소련 전역에서 핵물질을 긁어모아 ‘더러운 폭탄(dirty bomb)’을 만들 수 있다는데 우려를 표명해 왔다.
하지만 리트비넨코 사건으로 세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우려에 빠져있다. 대량살상 무기가 특정인 또는 특정지역에 대한 핵 테러 용도로 사용될 수 있음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국가의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푸틴의 정치 성향은 매우 긍정적이다. 핵물질의 안전한 관리가 강화되면서 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불순 세력들이 폴로늄을 자체적으로 확보할 기회도 그만큼 낮아진다는 이유에서다.
이와 관련, 런던에 위치한 한 국제전략연구소의 책임자로 근무 중인 옥사나 안토넨코 박사는 “많은 사람들의 심증과 달리 러시아가 정말로 이번 일과 전혀 관련이 없다면 이것이야 말로 무섭고도 두려운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시각을 달리해보면 리트비넨코의 암살은 푸틴의 정권 장악력이 서방세계의 생각보다 약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며 “이는 핵물질을 확보할 수 있거나 핵물질에 접근 가능한 독자적인 세력들이 돌출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문제에 정통한 분석가들도 구소련의 붕괴 이후 군부와 핵 기반시설들에 대한 통제력이 놀라울 정도로 느슨해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 구소련 전역에는 각종 생물학무기 실험과 화학무기 제조에 사용됐던 수많은 시설들이 남아있는데, 냉전종식 당시 러시아가 보유한 흑사병, 야토병(툴라레미아), 탄저병, 천연두 등의 병원균 무기만 해도 4만4,000톤에 달한다.
이중 20%는 올해 말까지 소각이 예정되어 있지만 금전적,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 물질들이 다른 목적으로 전용(轉用)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다.
더욱이 현재 상태로는 극소량으로도 큰 위험을 초래할 이 물질들의 불법거래를 막을 수 있는 특단의 보안책 마련이 힘든 실정이며, 국경지대 등에서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한 검역강화는 더욱 요원해 보인다. 설령 이러한 조치들이 취해진다 해도 방사능 물질 유통이 원천봉쇄 된다는 보장도 없다.
물론 앞으로도 당분간은 일반시민들 보다는 반체제 인사나 스파이들이 폴로늄과 같은 신종 무기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언젠가는 일반인들이 희생자로 전락하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즉 리트비넨코 사건은 단순히 기묘한 살인사건이 아니며 21세기 최초의 암살이자 방사능 물질을 동원한 최초의 살해라는 점에서 전 세계인들에게 커다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아마 암살자들은 바로 이 점을 노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누구도 우리로부터 안전할 수는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잠재적 위험성
비록 리트비넨코는 소량의 방사능 물질로 살해됐지만 매년 러시아에서 도난당하고 있는 핵물질은 핵탄두 제조도 가능한 양이다.
2004년 이후 국제원자력에너지기구(IAEA)의 불법 밀매 보고서에 등재된 250건의 도난사건 중 14건이 폴로늄-210과 관련이 있다. 물론 보고되지 않은 사례는 이 보다 더 많다.
불순분자들이 러시아에서 각종 위험물질을 손쉽게 구한 사례는 아래에 제시된 경우를 포함해 수십만 건이 넘는다.
2006
러시아 국민이었던 올레그 킨트사코프와 세 명의 공모자들이 그루지아 공화국의 비밀 보안 요원들에게 100g의 고농축 우라늄을 판매하려다가 체포됐다. 이 정도
양이면 핵무기 개발에 충분하다.
2005
모스크바 치안국 사령관이 러시아의 주요 핵 시설물 46개소 중 7개소만 제대로 된 보안 시설을 갖췄을 뿐 나머지는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핵 기관에서는 핵 관리에 확보된 예산이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의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2004
러시아 최대의 플루토늄 및 고농축 우라늄 처리시설 치안 책임자가 “경비병들이 핵물질 절도 및 탈취 공격에 대비한 테스트에서 번번이 불합격한다”며 “실탄 없이 순찰을 돌거나 핵물질을 몰래 빼돌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2003
러시아 법정에서 무기 수준의 플루토늄을 75만 달러(7억원)에 판매하려한 남자를 재판했으며, 고농축 우라늄 170g을 훔친 미국인이 그루지아 국경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체첸 핵시설에서 핵물질을 훔친 두 명의 10대 청소년들이 방사능 감염으로 사망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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