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통해 세계 2차 대전 최대의 격전 중 하나였던 이오지마 전투를 60여년 만에 다시 세인들의 입에 올려놓았다.
일본 본토가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정복된 전투이자 미군이 상대편보다 더욱 많은 인명피해를 강요당했던 몇 안 되는 이오지마 전투. 과연 얼마나 치열한 격전이었기에 이스트우드 감독이 영화를 한 편도 아닌 두 편이나 만들어 묘사했을까.
일본은 BC 660년 건국된 이래 단 한 번도 외국의 침략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불패의 나라였다.
물론 건국 이래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 자리를 놓고 수많은 내전이 벌어지기도 했고, 13세기에는 고려와 몽고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한 적도 있다.
19세기에는 미국이 전함을 앞세워 개항을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본토를 침략, 정복하는데 성공한 나라는 없었다.
여기에는 섬나라라는 지리적 조건도 한 몫 했지만 그 만큼 일본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 일본인들은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고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 정면승부를 벌여야 하는 상황에서도 일본 본토가 침략당하는 시나리오는 상정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군은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에게 연전연패했다. 1944년 8월에는 절대 국방권의 한 축인 마리아나 군도가 미군에게 함락됐고, 두 달 후인 1944년 10월에는 절대 국방권의 또 다른 축인 필리핀에 미군이 상륙한다.
이오지마는 2차대전 이전부터 일본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도쿄 도지사가 행정적인 책임을 지는 엄연한 일본의 본토였다.
미군의 다음 목표는 당연히 일본 본토.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에 앞서 일본의 전쟁수행 능력을 말살하기 위해 마리아나 군도에 B-29 전략폭격기 기지를 건설, 그해 11월부터 대일 전략폭격에 나선다.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본 정부는 이 순간까지도 항복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마리아나 군도와 도쿄 사이의 중간 지점에 있는 조그만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다.
면적 21㎢의 이 작은 섬에는 레이더기지가 설치되고 전투비행대가 주둔하게 된다. 미군의 폭격을 미리 감지해 본토에 알리는 한편 전투기를 출격시켜 B-29를 요격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이 섬의 일본군 위협을 없애고, 특히 이곳을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B-29의 비상시 중간기착지 및 호위전투기인 P-51 머스탱의 발진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공략을 계획한다.
뒷날 2차 대전 최악의 혈투 중 하나로 기록되는 이오지마 전투는 이런 이유로 시작됐다.
양군의 철저한 전투준비
이오지마는 2차 대전 훨씬 이전부터 일본 민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도쿄 도지사가 행정적 책임을 지는 엄연한 일본 본토였다.
이 때문에 이곳을 지키는 일본의 방어대책 역시 식민지에서 벌어졌던 이전의 전투와는 격이 달랐다. 우선 지휘관부터 최정예였다.
이오지마 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천황 근위사단장 출신인 구리바야시 타다미치(栗林忠道) 육군 중장. 육군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유학한 경력도 있던 그는 오직 ‘근성’만을 강조하던 대부분의 일본군 지휘관과는 달리 미국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던 몇 안 되는 지장 중 한명이었다.
그는 약 2만1,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1944년 여름 이 섬에 상륙했다. 과거 일본 식민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보면 일본군은 상륙한 미군에 맞서 ‘만세 돌격’으로 잘 알려진 무모한 돌격 전투만을 벌였다.
이 같은 돌격 전투는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휘말려 빠른 속도로 전력을 상실하고 결국에는 괴멸당하는 원인이 됐다. 그는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무절제한 돌격을 지양하고 대신 섬 전체를 꿰뚫는 총 30km 길이의 터널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 터널은 이오지마에 설치된 토치카 등 대부분의 방어설비와 연계돼 있었다. 이에 따라 한 지역의 방어설비 인원이 전멸해도 바로 새로운 인원을 보낼 수 있었다.
또한 막사, 병원, 탄약고 등 생활과 전투에 필요한 각종 시설이 완비돼 전투 이전 인구의 20배 이상에 달하는 막대한 병력이 지낼 수 있는 거대한 지하 도시로 탈바꿈했다.
미군 역시 이오지마 전투가 이제껏 치른 그 어떤 전투보다도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따라 1944년 12월 8일부터 72일간 이 작은 섬에 각종 항공기를 동원, 맹폭격을 퍼부었다.
지휘관으로는 현대 상륙전 이론을 완성한 미 해병대의 명장 홀랜드 스미스 장군. 상륙할 부대로는 역전의 제3, 제4해병사단과 신규 편성된 제5해병사단이 선정됐다. 이오지마의 방어 체계는 미군의 철저한 준비 폭격 아래에서도 무력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력해져만 갔다.
상륙과 국기 게양 사진
D-데이인 1945년 2월 19일. 오전 2시부터 시작된 함포 사격을 필두로 이오지마 상륙전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곧이어 미 해군의 항모 함재기와 육군 폭격기들이 이 섬을 폭격했다.
오전 8시 59분에는 제3, 4, 5해병사단 소속의 병력 7만명 중 선발대 3만명이 섬 남부 해안에 상륙을 개시했다. 이 순간까지도 일본군의 저항은 전무했다. 일부 해병들은 일본군이 상륙전 준비포격과 폭격에 의해 모두 괴멸된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미군이 해안을 완전히 메운 오전 10시 15분 경. 일본군은 갑자기 모든 화기를 총동원해 엄폐진지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기관총이나 박격포는 물론 섬 북부와 이 섬의 최고 고지인 161m의 스리바치산에서도 중포 사격이 가해졌다.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공격에 놀란 미군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무더기로 학살당했다. 상륙 첫날에만 566명의 미군이 전사하고, 1,854명이 부상당하는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
하지만 이 같은 혼란에도 불구하고 미 해병대는 진격을 계속했다. 그날 오전 10시 35분 제5해병사단의 1개 중대가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을 돌파, 섬 서해안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더욱 많은 미군이 섬을 가로질러 스리바치산을 섬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고립시켜 놓았다.
고지는 전황을 쉽게 관측할 수 있고, 그곳을 점령하려고 힘들게 올라오는 적군에게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천혜의 관측소이자 요새다. 이 때문에 어떤 전투에서도 그 중요성이 평가 절하된 적이 없다.
이오지마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륙한 지 4일이 지난 1945년 2월 23일. 섬을 완전 포위한 미군은 스리바치산 정복을 위해 제5해병사단 제28연대 제2대대 소속 1개 소대 규모의 정찰대를 스리바치산 정상에 파견한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리라는 예상과 달리 이 정찰대는 거의 무저항 상태에서 스리바치산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당초 스리바치산에는 일본군 약 300명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에 의해 산이 포위돼 다른 일본군과의 연락이 두절되자 그 중 절반은 전날인 22일 밤 미군의 포위망을 뚫고 산을 탈출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집단 자살하고 말았다.
병사를 인간이 아닌 무제한 보급 가능한 소모품 정도로 여기던 일본군의 용병사상이 빚어낸 비극적인 최후였다.
아무튼 2월 23일 오전 10시 20분. 스리바치산 정상을 점령한 미군 정찰대는 가져온 미국 국기를 게양한다. 사상 처음으로 일본 본토에 외국 침략자들의 깃발이 휘날리는 이 역사적인 모습은 섬 전체는 물론 이오지마 앞바다의 미군 함대에서도 잘 보였다.
함대에 동행했던 미 해군장관 포레스탈은 이에 감동해 게양된 성조기를 갖고 싶어했다. 하지만 큰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국기를 게양했던 해당 부대의 대대장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먼저 게양된 성조기를 대대 금고에 보관하고, 대신 더 큰 성조기를 게양하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주만 공습 때 격침당한 군함에서 건져낸 그 큰 성조기는 그 날 낮 12시경에 스리바치산 정상에 게양됐다. 이 때 AP통신의 사진기자 조 로젠털은 두 번째 성조기를 세우는 6명의 해병을 찍은 유명한 사진을 남긴다.
계속 이어지는 처절한 전투
성조기 게양은 어디까지나 스리바치산의 점령을 알렸을 뿐 이오지마 전투의 종식을 알리는 신호가 되지는 못했다.
스리바치산이 미군에 점령된 이후에도 일본군은 보병 8개 대대, 전차 1개 연대, 포병 2개 대대, 중박격포 3개 대대라는 막대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섬 전체가 터널로 연결돼 요새화돼 있던 까닭에 일본군은 미군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도 계속 튀어나와 미군을 공격했다.
미군은 이에 맞서 화염방사기와 수류탄, 그리고 항공 및 함포 지원사격으로 일본군의 방어시설을 하나하나 분쇄해가며 전진해 나갔다.
2월 24일에는 이오지마의 제1비행장, 3월 1일에는 제2비행장과 일본군 지하사령부가 미군에 의해 장악됐다. 또한 3월 9일에는 건설 중이던 제3비행장에까지 미군이 진격해 사실상 이오지마 거의 전 부분을 장악했다.
미국과 일본의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그 중에는 1932년 LA올림픽 승마 금메달리스트였던 일본군 제26 전차 연대장 니시 다케이치 중좌도 있었다. 그의 신분을 알아본 미군들이 항복을 권고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 3월 4일 B-29 ‘다이너마이트’호가 미군 중폭격기 중 최초로 이오지마에 비상착륙했다. 이후 종전 때까지 2,250대의 B-29 폭격기가 더 착륙했으며 착륙한 폭격기 승무원의 연인원은 2만4,761명이었다.
일본군 2만명이 전멸하고 미군 역시 이 이상의 인명피해를 낸 이오지마 전투는 2차 세계대전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하나다.
3월 초순 이후 이오지마의 일본군 주력 부대는 사실상 괴멸했다. 3월 16일에는 미 해군 니미츠 제독이 이오지마 전투가 사실상 종결됐음을 선언했으며, 다음 날인 17일에는 고이소 구니아키 일본 총리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이오지마 전투의 패배를 인정했다. 21일에는 구리바야시 중장의 빈 지휘소가 미군에게 발견돼 폭파당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산발적 저항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안 구리바야시 중장은 엄격히 금지해오던 만세 돌격을 허용한다. 그러나 이미 전력 대부분을 소진한 일본군에게 만세 돌격은 자살행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3월 25일 밤. 최후까지 남아있던 300명의 일본군이 제2비행장 근교에서 만세 돌격을 벌인 것이 이오지마 전투의 대미를 장식했다.
만세 돌격을 벌인 일본군은 거의 전원이 전사했으며, 미군 역시 이 마지막 전투에서 100명이 전사하고 20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전투가 끝난 후인 3월 26일. 이오지마에서 일본군의 모든 조직적 저항은 사실상 종결됐다.
이오지마 섬의 일본군 방위사령관 구리바야시 중장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지만 미군과의 전투 중에 전사했다는 설과 자살 후 부하들에 의해 암매장됐다는 설이 있다.
전사 및 포로를 면하고 살아남은 극소수의 일본군들은 섬에 숨어 살며 게릴라 전법으로 미군을 괴롭혔으며, 그 중 마지막 사람들은 종전 후 4년이 지난 1949년에야 미군에 항복했다.
이오지마 전투의 뒷이야기
이오지마 전투는 미군 역사상 가장 영웅적이고 장렬한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2차 대전 기간 중 미국 최고의 훈장인 의회 명예 훈장을 받은 미 해병대원은 모두 84명. 그 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27명이 이오지마 전투로 이 훈장을 수여받았다.
1954년에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미 해병대 전쟁박물관에 100톤이 넘는 규모의 국기 게양 조각상이 세워진다.
또한 1961년과 2001년에 취역한 해군 상륙함에 ‘이오지마’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등 이오지마 전투가 미국 전쟁사에 남긴 거대한 족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일주일이면 충분할 것이라던 이오지마 전투는 한 달이 넘게 진행됐다. 2만명이 넘던 일본군은 단지 216명의 포로를 남긴 채 전원이 전사했으며, 미군 역시 전사 6,825명을 포함해 2만7,909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냈다.
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의 연합군 사상자 1만명을 뛰어넘는 엄청난 손실이었으며, 미군의 사상자가 일본군의 사상자를 능가한 사례이기도 했다.
이처럼 엄청난 손실을 초래한 이오지마 전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찬반양론이 엇갈린다.
찬성론자들은 이 섬의 점령으로 많은 B-29 승무원들을 살려내 미국의 승리에 이바지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이오지마 점령 전 3개월간 비상착륙을 할 수 없어 손실된 B-29가 불과 11대라는 점을 강조한다. 굳이 이오지마 섬을 점령하지 않았어도 B-29 운용은 별 무리가 없었으며, 따라서 이 전투에서 발생한 해병대의 엄청난 손실은 인력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건 이오지마 전투에 참전한 개인들에게 이 전투는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 재앙이자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에 불과했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국기 게양 사진에 등장하는 해병들의 운명이었다.
국기 게양 사진이 가진 역동적이고 선동적인 이미지에 주목한 미국 정부는 등장 인물 6명 중 생존한 3명의 해병(레니 개그논 일병, 아이라 헤이즈 일병, 존 브래들리 병장)을 미국 본토로 송환했다. 그리고는 제7차 전쟁공채 판매 캠페인의 운동원으로 활용한다.
이름 없던 병사에서 한 순간에 국민의 영웅으로 부상한 세 해병은 그 충격으로 모두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아이라 헤이즈 일병은 술로 비참한 전쟁의 기억을 잊으려다 불과 32세에 거리에서 술에 취한 채 얼어 죽었다. 레니 개그논은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출세를 노리지만 실패하고, 아내에게 구박받으며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객사한다.
존 브래들리는 죽을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이오지마 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고 은둔하다가 지난 1994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들추는 전쟁사와 장군들의 영웅담, 화려한 무기 소개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는 이렇듯 이름 없는 개인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슬픔과 비탄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글_이동훈 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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