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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최악의 졸전, 임팔 전투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왜 백 번 다 이긴다고 하지 않고 위태롭지 않다고 했을까? 그것은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제3의 요소인 자연환경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1944년 3월부터 인도 임팔에서 전투를 벌인 일본군은 자신의 실력도 모르고, 적의 실력도 몰랐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기본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제3의 요소인 자연환경도 몰랐기에 끔찍한 패배를 자초했다.

1942년 초. 버마(현 미얀마)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은 노도와 같이 아시아·태평양을 휩쓸던 일본군에 밀려 미얀마-인도 사이의 자연 경계인 아라칸 산맥을 넘어 인도 아삼 주의 도시 임팔(Imphal)로 후퇴하기에 이른다.

아라칸 산맥은 울창한 정글이 우거진 자연의 국경선으로서 연 강수량이 9,000mm에 달하는 열대 우림지역이다. 따라서 일본군은 이 같은 자연 장애물은 물론 보급능력의 한계로 아라칸 산맥을 횡단해 연합군을 소탕하는 대신 버마 영내에 머무르게 된다.

그 후로 오랫동안 인도의 연합군은 반격을 위해 전열을 재정비, 패주 후 2년이 지난 1944년 초에는 다시 아라칸 산맥을 넘어 버마 영내에서 일본군을 몰아낼 채비를 갖추게 된다. 임팔은 어느새 여러 개의 비행장과 보급시설을 갖춘 거대한 병영 도시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본격적인 공격에 앞선 전초전으로 연합군 특전부대가 인도-버마 국경지대에 출몰하면서 일본군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일본군도 이 같은 연합군의 의도를 눈치 챘지만 미드웨이와 과달카날 이후 거듭되는 패전으로 전황은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었다. 특히 태평양에서 제공권과 제해권을 상실하면서 현대전 수행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보급 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요컨대 미심쩍다고 먼저 공세를 취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하지만 1943년 3월 버마 서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육군 제15군의 사령관으로 무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 장군이 취임하면서 상황에 변화가 생긴다. 무다구치 장군은 사령관에 취임하자마자 인도 아삼 주의 연합군에 대해 야심찬 반격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중일전쟁을 촉발한 노구교사건의 주동자이기도 했던 그는 상황이 1942년처럼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라칸 산맥을 넘어 아삼 주의 연합군을 몰아내고, 더 나가서 인도 내의 전 영국군을 괴멸시킬 야심에 가득 차있었다.

그가 이렇게 잘못된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인도의 반영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스(Chandra Bose)의 부추김도 한 몫 했다. 인도 국민군이라는 친일파 인도 독립군사 단체(약 4만3,000명 규모, 일본군에게 체포된 영국군 소속의 인도인 포로 중 전향자들을 주축으로 편성)의 우두머리였던 그는 일본군이 인도를 침공한다면 자신의 인도 국민군도 함께 싸워 대대적인 반영 항쟁을 벌이겠다고 일본 수상 도조 히데키에게 공언했던 것이다.
이미 패색이 역력했던 제2차 세계대전 후반의 일본군이 벌였던 전투 중에서도 명실공히 최악의 졸전으로 꼽히는 임팔 전투는 이렇듯 야심가들의 무모한 망상에서 출발했다.

무모한 작전계획

이른바 ‘우(ウ)호 작전’으로 불리는 일본군의 임팔 공략 계획은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일본 육군 제15군 예하의 3개 사단 중 제15사단, 제33사단, 그리고 이 두 사단의 혼성부대인 야마모토 부대가 친드윈 강과 아라칸 산맥을 넘어 임팔 주변의 인도군을 격퇴하고, 각각 북쪽·남쪽·동쪽에서 임팔을 포위 공격한다. 그리고 제31사단은 임팔 인근의 코히마를 공격해 함락시킨다.

이와 함께 찬드라 보스의 고집에 의해 인도 국민군 제1사단 예하의 여러 부대들도 이들 일본군 부대에 합류해 전투 및 연합군 전선 후방에서 사보타지, 선무공작을 수행하기로 계획됐다. 단 이들 인도 국민군이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리라고 여긴 일본군 장교는 드물었다. 어디까지나 총알받이 내지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선전용 부대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무다구치 사령관 휘하의 각 사단장들은 우호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그들이 걱정한 것은 무엇보다도 보급이었다. 3개 사단 6만5,000명이 넘는 병사를 먹여 살리는 일은 평시에조차 장난이 아니다.

하물며 연합군과 싸우며 2년 전에 돌파를 포기한 아라칸 산맥까지 넘어야 한다면 엄청난 보급상의 난제가 기다릴 것이라는 점은 3살 먹은 아이라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연합군의 전력은 2년 전에 비해 훨씬 강해져 있었다.

이 보급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무다구치 사령관의 아이디어가 실로 가관이었다. 그는 이른바 ‘징기스칸 보급’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과거 징기스칸이 이끌던 몽골 군대는 유목 민족답게 많은 수의 양과 소를 끌고 다니며 방목하다가 필요할 때마다 도축해서 병사들의 식량으로 삼았다.

이를 모델로 삼아 일본 제15군도 많은 소를 끌고 다니며 수송수단으로 쓰다가 기력이 다하면 잡아먹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의를 제기하는 참모들에게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황군의 정신력을 무시하는가! 정 안되면 정글의 식물을 먹으면서 버틴다!”

결국 1944년 3월 8일. 일본 제15군의 선봉부대가 친드윈 강을 건너 아라칸 산맥으로 향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 인도 석권을 노린 이 거창한 ‘전쟁놀이’의 막이 올랐다. 무다구치 사령관은 불과 3주일이면 임팔을 점령하고, 인도 공략의 교두보를 확고히 다질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듭되는 졸전

임팔 방면을 지키고 있던 연합군은 인도군 4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여단, 1개 공수여단으로 구성된 제4 인도군단을 주축으로 한 15만 대군이었다. 일본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

군단장 제프리 쿤스 중장은 일본군의 공격 소식을 듣자 전방 국경지대에 배치된 사단들을 임팔로 철수시켜 방어태세를 굳히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인도군 제20사단은 무사히 철수하는데 성공했지만 제17사단은 철수 도중 일본군에게 포위됐다.

하지만 3월 18일 인도군 제18여단이 일본군 제214연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히고, 인도 제17사단도 일본군의 포위를 뚫는데 성공하는 등 연합군의 반격은 점점 만만치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4월 4일 인도 제17사단은 인도 제23사단의 지원을 받아 임팔까지 철수에 성공했다. 그 와중에 일본군 제31사단은 코히마 공격을 시도해 4월 6일에 코히마를 점령, 임팔 남부를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31사단과 함께 양동공격을 하기로 했던 일본 제55사단은 아라칸 산맥에서 슬림 장군의 인도군 제5사단에 막혀 공세에 실패하고 만다.

4월 초 나머지 일본군 제15, 33사단도 계획대로 임팔을 포위하고 공략전에 나섰다. 하지만 3주일이면 충분하다고 호언했던 작전이 이미 1개월 이상 늘어진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미 일본군의 진격은 난항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임팔 남부로부터 진격하던 일본군 제33사단장 야나기다 장군은 지나치게 소심하게 진격하다가 정확한 공격 타이밍을 놓쳐 인도군 제17사단 격파에 실패했고, 분노한 무다구치 사령관은 그를 해임했다.



일본 제15, 33사단 소부대의 혼성부대인 야마모토 부대는 나중에 합류한 인도 국민군 제2 게릴라연대와 함께 동쪽으로부터 임팔로 진격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곳의 지형은 방어 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전차와 중포 지원에도 불구하고 야마모토 부대는 결국 임팔 점령에 실패했다.

북으로부터 임팔을 공격하던 일본군 제15사단 본대는 전차와 중포로 중무장한 인도군 제5사단의 반격에 부딪쳐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어이없게도 임팔의 일본군은 연합군의 전력을 실제 이하로 과소평가해 연합군의 기갑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대전차화기를 충분히 가져오지 않았다. 아직도 연합군을 1942년 수준의 약체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연합군의 전력과 병력은 이미 일본군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특히 항공 전력은 일본군보다 20배나 강해 임팔 지역의 제공권은 완전히 연합군의 손 안에 있었다. 게다가 연합군은 기습에 강한 일본군에 대처하기 위해 정글이 아닌 평지에 진지를 건설해놓고 막강한 화력을 기본으로 방어전투에 임했다.

분노한 무다구치 사령관은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인 4월 29일까지 임팔을 손에 넣어야 한다면서 부하들을 독려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본군의 열세와 패색은 짙어만 가고 있었다.

백골가도

일본군의 적은 연합군만이 아니었다. 지난 1942년 일본군의 진격을 가로막았던, 짐승조차 다니기 힘들다는 울창한 정글과 보급부족도 그들이 직면한 또 다른 강적이었다.

정글을 통한 보급이 어렵다는 것은 이미 많은 일본군 참모 장교들이 예견한 바였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 보니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무다구치 사령관이 자신 있게 주장한 징기스칸 보급이라는 것도 실전에서의 성과는 너무나 형편없었다. 동물들이 포성을 듣고 놀라 도망쳐 버리거나 강을 건너는 도중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물론 험난한 정글을 지나가다가 탈진해 죽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양력 4월부터 이 지역에 몬순 폭우가 쏟아지자 정글을 통한 일본군의 보급은 거의 중단 상태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항공보급을 펼칠 수도 없었다. 이 지역의 제공권은 연합군에 의해 완전 장악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항공기를 띄웠다가는 격추당하기나 할 뿐이었다. 하지만 항공보급 덕분에 일본군이 오히려 득을 본 경우도 있었다. 바로 포위된 임팔 시내에 떨어뜨리는 연합군의 보급물자 중 일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이 같은 노획 물자를 ‘짜찌루(영국수상 처칠의 일본어식 발음) 급여’라고 부르며 애용했다. 당초 우호작전에서는 보급물자 부족을 예견해 이 같은 연합군의 물자를 최대한 노획해 활용하라는 지침도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도 바보는 아니어서 우호작전 초기 일본군의 진격로상에 있던 보급소는 거의 모두 파괴하거나 소개해 버렸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분전에도 불구하고 노획 물자를 통해 보급 부족을 해소하기 힘들었다.

연료, 탄약, 식품, 약품 모두가 부족해지니 당연히 제대로 된 전투가 될 턱이 없었다. 엄청난 수의 일본군 장병들이 연합군이 아닌 기아와 풍토병이라는 새로운 적의 손에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결국 5월 초 여세를 잃어버린 일본군의 공세는 정지당했고, 이후 연합군의 맹반격이 시작됐다.

5월 말. 코히마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31사단은 인도 제33군단에 밀리다가 결국 코히마를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해 버렸다. 그리고 임팔 북부를 공략하던 일본군 제15사단도 병사들이 인근 부락을 약탈하거나 보급품을 자체조달하기 위해 진지를 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6월 22일 인도 33군단이 포위망을 뚫고 임팔의 인도 제4군단과 상봉함으로서 일본군의 우호작전은 사실상 끝이 났다.

일본군은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본군 제33사단에 보충병 1개 연대를 보강시켜 인도군 제17사단 지역을 돌파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일본군 제15사단과 야마모토 부대도 더 이상 공격을 펼칠 능력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부대가 움직이지도 않는 사태에 직면한 무다구치 사령관은 결국 작전개시 4개월이 지난 7월 3일 우호작전을 중지하고 투입했던 부대를 모두 철수시킨다. 가져갈 수 없는 무기와 장비는 모두 내버려졌으며, 심지어는 움직일 수 없는 중상자와 병자도 버리고 철수했다.

일본군이 후퇴하는 길에는 무수한 전사자와 아사자, 병사자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열대 우림의 습하고 더운 기후 때문에 시체는 3일만 방치해도 피부가 다 썩어 탈골됐다. 군복과 장비를 걸친 백골들이 잔뜩 누워 있는 진풍경이 연출됐고, 뒤쫓는 연합군들은 진격보다도 일본군 시체를 화장해 위생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급할 지경이었다. 문자 그대로 뼈로 길을 이룬 백골가도였다.

일본군은 전사자 1만3,500명을 포함해 5만5,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 타격으로 공세에 참가했던 일본 제15군과 인도 국민군 병력은 사실상 괴멸 당했다. 반면 연합군의 피해는 사상자 1만7,500명에 불과했다. 인도 정복의 야욕이 참담한 패배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임팔 전투의 파문

이 한 판의 도박에서 엄청난 인원과 장비를 상실한 일본의 버마 주둔군은 제해권 상실로 인한 보급차질까지 겹쳐 전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후 인도-버마 국경을 넘어 반격에 나선 연합군에게 계속 밀려 1945년 봄이 되면 사실상 버마 전토가 연합군에게 탈환된다.

임팔전투에 나선 일본군은 울창한 정글과 보급지원 두절에 다른 작전의 한계로 최악의 졸전을 면치 못한다.

일본군이 임팔 전투를 하지 않고 방어태세를 굳혔더라면 연합군이 버마를 탈환하는데 더 많은 희생과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임팔 전투가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한편으로 이 전투는 보급과 정보, 현지의 자연환경 파악을 무시하고 무리한 돌격 전투만을 좋아하던 일본군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쟁도 자원을 적재적소에 투입해야 이기는 일종의 ‘사업’이며, 그만큼 치밀한 준비와 계산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시의 일본 군부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점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바로 패장 무다구치 사령관에 대한 일본 군부의 처리였다. 무리한 작전 진행으로 1개 군을 괴멸시켰음에도 무다구치 사령관은 임팔 작전 종료 후 처벌은커녕 일본 예과사관학교 교장으로 영전했다. 또한 전후에는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1948년 석방된다.

그는 1966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은 임팔 작전 실패에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모든 것은 부하들의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잘못된 리더십의 전형을 여실히 보여주는 반면교사가 아닐 수 없다.

글_이동훈 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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