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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중문화, 팝아트, 그리고 삼성

‘세상에 퍼져 있는 모든 통념은 도전의 대상이다.’

예술계에서 으뜸 덕목은 뭐니 뭐니 해도 독창성일 것이다. 남들이 하는 대로 해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어렵다.

실제 새로운 미술사조는 등장할 때마다 비난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기존의 상식을 뛰어 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패러다임을 바꾸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반듯하고 깔끔한 초상화와 정물화 대신 선을 흐트러뜨리며 빛이라는 개념을 화폭에 표현해 낸 인상파(Impressionism)가 그랬고, 2차원에 머물러 있던 대상을 3차원으로 해석해 낸 입체파(Cubism)가 그랬다. 1960년대 선보인 팝아트 역시 기존의 통념을 바꾸며 등장했다.

예술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문화적 아이콘이다. 대량생산과 대중매체가 만들어 낸 새로운 예술 트렌드인 팝아트는 지금까지 세계 전역에 다양한 형태로 퍼지면서 많은 작가들을 배출해 냈다.

어쩌면 팝아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근 들어 가장 관심을 갖게 된 미술사조인지도 모른다. 기업의 비자금으로 미술품을 구입했다는 의혹이 터져 특별검사까지 받고 있는 삼성 사건의 한 가운데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같은 팝아트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캔버스를 해체한 팝아트

196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팝아트는 미국이라는 사회를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는 미술 장르 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가 일정 궤도에 오르면서 서구사회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풍요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됐다. 대량생산으로 의식주가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중산층을 중심으로 자동차가 급속하게 보급됐다. 또한 대중매체가 등장하면서 정보는 더 이상 소수의 독점적인 권력이 아니게 됐다. 물론 그 선두에는 미국이 있었다.

1960년대는 이 같은 분위기가 절정에 오르게 되며, 문화 분야에서도 미국의 위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실제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는 세계 전 지역으로 보급되면서 앤 마가렛, 팻 분, 도리스 데이, 잉그리드 버그만, 험프리 보가트,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쟁쟁한 스타들을 배출시켰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 짐 리브스 등의 경쾌한 노래 역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미국의 미술이 세계에 알려진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는 추상 표현주의, 신 표현주의 등 추상미술의 극치에 달하는 미술사조가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젊은 작가들은 평면작업에 한계를 느끼며 돌파구를 찾던 중 설치예술(Installation)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공간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된다.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몸을 예술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해프닝과 퍼포먼스가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당시 독일에서는 백남준, 조셉 보이스 등 많은 예술가들이 피아노를 부수고 전시장 앞에 피 흘리는 황소의 모가지를 걸어놓는 플럭서스(Fluxus)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는데, 뉴욕에서도 다양한 퍼포먼스가 열렸다.

특히 1961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조립예술(The Art of Assemblage)전은 뉴욕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캔버스에 얌전히 있어야 할 이미지들이 탈출을 시도하기 시작했던 것. 작품들은 하나같이 쓰레기 더미를 연상시키는 것들이었다. 캔버스에 신문지, 천조각 등을 구기고 밟아서 붙이고 그 위에 물감을 쏟아놓은 것 같은 그야말로 쓰레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팝아트는 캔버스에 갇혀있던 이미지를 구출해 내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사물에 대한 관념이 바뀌기 시작한 것. 당시 유명작가로 자리를 잡고 있던 로버트 라우센버그, 프랭크 스텔라, 재스퍼 존스 등은 평면작업을 벗어나 대량생산과 대중문화를 입체적으로 표현해 내 팝아트의 시조로 군림하게 된다.

특히 존스는 미국 국기, 과녁판 등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캔버스에 그리고 주변에 관련된 형상을 함께 붙여 입체적인 회화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국기가 예술의 대상이 되고, 언어를 만드는 구성 매체인 알파벳이 캔버스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라우센버그, 스텔라, 존스 등에 의해 싹이 트기 시작한 팝아트는 앤디 워홀(1928~1987),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 등에 의해 열매를 맺게 된다.


반복의 미학, 앤디 워홀

지난해는 워홀이 약물 중독으로 병원에서 세상을 뜬지 20주기가 되던 해다. 팝아트의 간판스타로 살아생전 피카소보다 더 화려한 작가로 기억되는 워홀은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에서 태어났다.

1945년 카네기 공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그는 피츠버그 조셉 혼 백화점에 취직해 다양한 일을 하게 된다. 그의 대표작 중에는 여성용 뾰족구두를 그린 작품이 많은데, 이는 그가 백화점에서 일했던 것과 무관치 않다. 실제 당시에 했던 쇼윈도 장식 일은 후에 그가 팝 아티스트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1950년 뉴욕으로 이사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던 워홀은 21세기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르크 뒤샹을 우상으로 삼고 마티스 같은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1960년대에는 뉴욕의 자유로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스스로를 부각시켰다. 실제 그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주제로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한마디로 그는 예술가적인 기질과 아울러 시대를 잘 이용할 줄 아는 현명한(smart) 사람이었다.

그는 성공을 위해 갖은 방법을 불사하는 약삭빠른 구석도 있었다고 평가 받는다. 말수가 적고 부끄럼을 탔지만 당시 미술계의 동향을 제대로 관망했던 그는 물질문명 시대에 어울리는 그림이 무엇인지 간파했던 것이다.

그는 당초 만화를 통해 팝아트에 접근했다. 1960년에 그린 ‘딕 트레이시’는 당시 인기 만화가인 체스터 굴드의 유명한 만화 주인공 딕 트레이시를 캔버스에 옮긴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만화 기법은 금방 도전을 받게 된다. 만화 이미지로 팝아트의 한 계보를 만들어 낸 리히텐슈타인이 인기를 끌면서 그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대표작 ‘켐벨 수프 캔’은 리히텐슈타인의 도전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나 먹었던 켐벨 수프였지만 그림으로 그린 작가는 없었다. 아무도 그리지 않았던 캠벨 수프 캔은 주변의 일상에서 소재를 찾았던 재스퍼 존스의 생각을 진화시킨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에게 팝아트의 선두주자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사과와 촛대를 놓고 정물화를 그렸듯이 워홀에게 캠벨 수프 캔은 사과와 촛대를 대신하는 일종의 정물화였던 셈이다.

1962년 워홀은 로스앤젤레스의 미술 중개상 어빙 블럼에게 전시회를 제안한다. 그해 7월 열린 전시회에 나온 캠벨 수프 캔 32점(캠벨 수프 캔은 판화 작품)은 각각 1,000달러에 팔려나가면서 팝아트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타임지는 ‘케이크 한 조각 스쿨(The Slice of Cake School)’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군의 화가들은 현대문명의 가장 진부하고 저속하기조차 한 장식물도 캔버스로 운반하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썼다. 워홀이 뉴욕 미술계의 중심으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된 것.

워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반복의 미학’이다. 캔버스에 얌전하게 아크릴이나 유화로 한편의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시대에 어울리게 한 가지 이미지를 간편하고 빨리 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판화 기법 중 하나인 실크 스크린. 인쇄 매체가 활성화되던 당시에 딱 어울리는 방법이었다. 워홀은 실크 스크린으로 같은 이미지를 한꺼번에 여러 개 만들어 내 다른 색상을 덧대기도 하고, 같은 이미지를 한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그리는 등 좀 더 상업적인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혼자 그리기 힘들 때는 조수도 동원했다. 잘 나갈 때 워홀은 조수를 16명이나 두기도 했다. 그의 작업장을 ‘워홀 팩토리(Warhol Factory)’라고 불렀던 워홀은 하루에 수백여점의 그림을 양산해 내기도 했다.

리히텐슈타인의 망점

‘행복한 눈물’로 2008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리히텐슈타인 역시 팝아트의 대가로 기억되고 있다.

뉴욕의 중상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58년 입체주의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초기 평가는 신통찮았다. 그에게 가장 큰 자극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동화책을 읽고 있던 자신의 아들이었다.

“아빠는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릴 수 없을 거야.” 196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키 마우스 동화책을 읽던 아들이 한 말이었다. 아들의 말에 자극을 받은 리히텐슈타인은 미키 마우스가 등장하는 그림 여섯 점을 그리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이봐 미키 마우스’는 낚시 줄을 끌어 올리는 미키 마우스에게 도날드 덕이 “자신의 옷이 낚시에 걸린 것(Look Mickey, I’ve Hooked a Big One)” 이라고 말하는 익살스러운 장면이다. 그림을 완성한 후 리히텐슈타인이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 그림을 내놓자 수준 이하의 것이라며 평단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뉴욕 미술계에 알려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개월이 지나자 라우센버그와 존스 등 당시 뉴욕 화단을 주름잡던 거장들이 그의 그림을 다시 보게 되자 작품에 대한 평론가들의 시선은 부드러워졌다. 그림도 잘 팔렸다.

그 뒤로 리히텐슈타인은 만화 같은 팝아트로 세계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망점(dot)을 알아야 한다. 대량 인쇄가 가능해지기 시작했던 1960년대. 리히텐슈타인은 인쇄된 종이를 확대하면 나타나는 수많은 망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어차피 만화의 한 장면을 확대해서 캔버스에 그리는 것이 작업의 중요한 과정이라면 분명 망점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인쇄상의 기술적인 과정을 의도적으로 과장했던 것.

또한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보면 왜 망점을 그리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종종 슬라이드 환등기를 이용해 작은 만화 이미지를 크게 확대했는데, 그 윤곽을 따라 그리는 방식을 사용하다 보니 망점이 눈에 띄게 확대돼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리히텐슈타인은 눈에 보이는 대로 대중매체를 해석하면서 자신만의 기법을 만들었다.그림도 잘 팔리고 만화에 흥미를 느낀 리히텐슈타인은 1962년부터 미국 문화의 경박함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만화의 무자비한 폭력 장면과 싸구려 로맨스를 풍자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두 대의 제트 전투기가 격돌하는 찰나를 포착한 걸작인 ‘와~암!(Whamm!)’은 전쟁의 현실적 감각이 제거된 우화적 표현 기법으로 전쟁이 내포하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제거하고 경쾌함과 신속함을 묘사했다.

호크니와 인터넷 문화

또 다른 팝 아티스트로 데이비드 호크니(1937~)가 있다. 삼성 일가가 샀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닉 와일더의 초상’을 그린 주인공이다.

영국은 미국보다 팝아트가 먼저 시작됐지만 미술계에서의 영향력은 미국에 뒤쳐져 있었다.

1960년대 초는 비틀즈와 롤링스톤스가 음악과 패션에서 혁명을 일으키며 영국 대중문화의 전성기를 일궈가던 시기였는데, 호크니 역시 이 때 팝아트의 선두주자로 부상한다.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에게 미국은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전통적인 가치관과 권위가 무너져 내리고 자신들의 문명에 대한 좌절감으로 이유 없는 반항이 난무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의 어둡고 음산했던 분위기와 달리 개방적이고 감각적인, 그리고 눈부신 태양은 그에게 새로운 감각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그에게는 태양빛이 가득한 캘리포니아의 자연과 그 속에 멋지게 펼쳐진 현대 건축이 초현실적이면서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특히 넓은 잔디밭 위에 사계절 푸른 물이 반짝이는 수영장은 신기하면서도 동경의 대상, 그리고 예술적인 자극이 됐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유난히 수영장이 많이 등장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터키석 같은 하늘과 정사각형 유리창에 쏟아지는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빛, 깔끔하게 다듬어진 잔디, 그리고 아무도 없는 빈 의자가 그의 수영장 그림을 구성하는 주요 소재다. 하지만 수영장은 다소 건조하고 황량해 보인다.

그의 그림에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친구인 닉 와일더가 물속에 앉아 있기도 하고, 때로는 벗은 채 뒤로 서 있는 모습 등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대부분 혼자다.

또한 방금 누군가 물속으로 첨벙 뛰어든 듯 물방울이 튀기거나 그림에는 아무도 없지만 수면 위로 일렁이는 물결을 표현해 수면 아래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은 다양한 감성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즉 정지된 시간 같지만 수영장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계속되는 것 같은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닉 와일더의 초상’, ‘큰 첨벙’ 등 수영장 시리즈로 유명해진 호크니는 ‘영원’과 ‘찰나’를 동시에 그려내면서 현대 회화사에서 ‘상충하는 시간 개념의 포개짐’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찰나적이고 가벼워 쉽게 망각되는 특징을 갖고 있는 대중매체와 대중문화를 자유롭고 화려하게 즐기려는 당시의 시대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호크니는 앙리 마티스의 밝은 색상과 피카소의 입체주의 기법을 적절하게 섞어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창조해 냈다. 그의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는 보이는 대상을 단순히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면 속에서 부활시키기 때문이다.

호크니는 작품을 통해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흥미로움, 그리고 예상치 못한 신선함과 자유로움을 느껴보라고 말한다. 마치 남의 집을 몰래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의 작품은 현대인들이 열광하는 인터넷 문화와도 닿아있다.
자신의 블로그를 화려하게 꾸며놓고 익명의 많은 사람들을 초대, 그들을 이중삼중으로 관찰하는 요즘의 누리꾼 행태와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예술은 이렇게 시대를 반영한다.

장선화 서울경제 기자 india@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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